늘 맞지는 않아

고오집쟁이의 적응

by 체리
다니엘 맞추려고 던지는 거 아님

처음으로 프랑스에 왔을 때 나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몰랐다. 인생에서 드물게 용기를 내어 시작한 모험이 그저 신기하고 좀 불안했다. 이 나라에 관해 가진 거라곤 얄팍한 지식이 다였다. 그래서 다니엘이 말하는 게 곧 프랑스였고, 다방면의 주제에 관해 다니엘이 가진 의견을 스펀지처럼 받아들이곤 했다. '이건 그냥 내 의견일 뿐이야'라는 말이 의례적으로, 우리 사이에 오가기는 했지만 습관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을 뿐이다. 언제 고개를 끄덕였냐는 듯 나는 무슨 문제가 생기면 다니엘의 의견을 물었고, 다니엘은 자기 나름의 답을 주었다. 그렇게 다니엘 지식in은 성황리에 영업을 시작했다. 지식을 얻는 창구가 다니엘뿐이라는 건, 언어 능력과 배경지식 없이 덜컥 시작한 워킹 홀리데이에 찾아온 한계였다. 회사에 들어가고 단기, 혹은 장기 비자를 소지한 동료 외국인을 만나면서 하나의 의문이 생겼다. 으잉 다니엘 말이랑 다르잖아? 물론 나나 다니엘이나 인간이기 때문에 늘 맞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가 같은 문제를 다른 시각으로 보고 있다는 위화감은 커플로 지낸 연차가 늘어날수록 커져 갔다.


너무 가까워서였을까? 한 발 떨어져서 보면 뻔하디 뻔한 게 그때는 잘 보이지 않았다. 프랑스인이 사는 프랑스와 외국인이 사는 프랑스는 같지만 다른 나라라는 사실이 말이지!! 입장이 반대였다면 나 역시 한국인이 보는 한국을 벗어나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도 말이다. 당시 다니던 회사는 외국인 근무자들이 많았다. 내가 습득한 비자나 세금 신고 관련 정보도 물론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어서 다니엘이 모처럼 신경 써서 찾아봐 주어도 실제 내게 적용되는 조건과는 다를 때가 있었다. 내 딴에는 자꾸만 다니엘에게 신세를 지는 게 싫어 이곳저곳 다니며 알아온 정보인데 다니엘이 알아봐 준 것과는 다르니 어째 의도와 결과가 부합하지 않는 상황도 한 번씩 있었다. 그런 상황이 민망하고 내 일인데 내가 알아서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답답했지만 덕분에 눈이 좀 뜨였다. 하루아침에 내 행정 관련 일을 알아서 할 수 있게 된 건 아니지만 잠시 머무는 외국인 입장에서 한발 나아가 주관을 형성한 것이다. 넉살도 좋아져서 '내 비록 네가 없으면 편지 하나 시원스럽게 못 쓰는 상태지만 그래도 네가 늘 옳지는 않다'라고 말할 수도 있게 되었다.


우리 둘의 입장 차이를 직시하고 보다 내게 맞는 정보를 찾을 수 있게 된 건 좋은 일이지만 이 주관을 내 고집에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프랑스에서 보내는 첫 1년 동안 끈질기게 나를 괴롭힌 향수병이 다시 돌아온 후에도 스멀스멀 일상에 침투할 무렵이었다. 다니엘은 한 번씩 사람들 좀 만나라고 제안했는데 향수병 필터가 한 번 씌워지니 ‘난 새로운 친구를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 멀리 있는 친구들이 보고 싶은 것뿐이야’라고 자꾸만 고집을 부리게 되는 것이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프랑스어 능력과 직업이라고, 친구는 차차 사귀어도 되는 거라고. 나한테 필요한 건 내가 제일 잘 안다면서 다니엘이 가해 오는 가벼운 압박을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당시에 파리 친구들을 만나려는 노력을 안 했던 것은 아니고 그저 내가 괜찮을 때 친구들은 전부 여름휴가를 떠나거나 핸드폰 번호를 바꾸는 바람에 약속이 미뤄진 것뿐이지만 그걸 몰랐던 다니엘은 내가 진한 향수병에 또 한 번 발목을 잡힌 줄로 착각했던 거다. 하지만 친구들이 여름휴가에서 돌아오고, 또 바뀐 번호로 다시 한 번 연락이 닿으면서 ‘나한테 필요한 건 내가 제일 잘 안다’는 내 옹고집은 거짓부렁이 약간 섞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늘 옳은 사람은 없기 때문에 인간은 모여 살도록 만들어진 것일까. 그 순간에 나는 틀렸고 다니엘은 맞아서, 또 다니엘이 틀렸을 때 내가 맞아서, 우리는 여러 언덕을 넘어 오늘까지 왔다. 물론 둘 다 틀렸을 때도 있었지만, 언제 한 번은 내가 ‘솔직히 네가 맞고 내가 틀릴 때보다 둘 다 틀릴 때가 기분 좋다’고 했더니 다니엘이 ‘인성 보소..’ 비슷한 말을 했었다(What a mentality: 대애단한 사고방식이구나!).


다니엘이 틀리고 내가 맞았다는 것을 그가 눈치챘을 때의 쾌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내가 틀렸을 때도 맞는 말을 해줄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올해에 농사지은 프랑스어로 내년부터는 다니엘의 행정업무 부담을 덜어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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