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

슬픈 리스트

by 체리

락다운이 5월 11일까지로 연장되었다. 하지만 코로나의 전염성을 생각해 보면 최소한 6월 중순까지는 유지가 될 것 같다. 자연히 6월 중순에 비자 연장 일정이 있는 나는 '어차피 경시청 약속 취소될 것 같은데 ... 서류를 준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는 고민에 시달리고 있고 그건 아마 다른 수많은 비자 소지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대국민 담화에서 5월부터 이루어질 순차적인 개학에 대한 언급이 나온 만큼 코로나 2차 폭발로 인한 더 높은 강도의 락다운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함을 느낀다. 바칼로레아도 취소된 마당에 사이버 개학은 왜 안 되는 건가.


갇혀 지내는 동안 생활이 많이 바뀌었다. 우리는 하루에 한 번씩 요가를 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필요한 음식을 사러 나가는데 두 명이 나가도 한 번만으로 원하는 것을 다 사 오기는 어렵기 때문에(특히 고양이 모래는 무거우므로) 가끔은 두 번을 나가기도 한다. 과일이나 채소가 꽤 무게가 나가니까. 아직 델프(프랑스어 시험) 시험이 취소되지 않을 거라 믿었던 시절의 나는 공부를 하면서 동기부여도 할 겸 시험이 끝나면 하고 싶은 일 리스트를 적어놨었는데 지금 와서 그 리스트를 보면 슬퍼진다. 리스트는 대략 아래와 같다.


- 테른스가에 과일 사러 가기

언젠가 이 주변에서 샀던 뮤스카 종 포도(머루포도같은 맛)가 정말 맛있었기 때문에 다시 과일을 사러 가고 싶었는데 과일 사는데 만 오며 가며 두 시간이 날아가서 갈 마음 내기가 쉽지 않았다. 이 근처 과일이 집 근처보다 비싸기도 했고.


- 새로 나온 게임 겁나하기

이건 솔직히 출시 시점부터 2주 되는 시점까지 65시간 넘게 했기 때문에 별로 슬플 이유가 없다.


- 사랑의 불시착 보기

물론 넷플릭스에서 새로 나온 드라마를 공개해 주는 것만도 감지덕지할 일이지만 아무래도 프랑스 넷플릭스에 공개되기까지는 한국 넷플릭스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사랑의 불시착이 방영된 지 한참 뒤에야 볼 수 있었다. 개연성이 떨어지는 드라마를 싫어하는 다니엘이지만 그래도 남북의 문화를 어느 정도 볼 수 있다는 점 덕분에 흥미로워 했다. 시험 취소 메일이 오자마자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 봉 마르셰 백화점에서 로스트 체리와 잉글리시 페어 프리지아 시향하기

솔드(전국 세일 기간) 때 톰포드의 고오급진 체리 향수 '로스트 체리'를 할인하는 걸 봤지만 시향도 안 해본 향수를 이돈 주고 살 수는 없다는 마음에 시험만 끝나면,,.. 내가 시험만 끝나면 꼭 다니엘과 봉마르셰 백화점에 놀러 가서 관심 가던 향수들을 시향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먹었었다. 그런데 통행 제한령이 내려질 줄이야! 만약 코로나가 조기 진화되어 예정대로 시험도 보고 원하던 것처럼 백화점에 향수도 구경하러 갈 수 있었다면 해야 할 일을 시간 안에 끝내서 아주 개운했을 것 같다. 이런 '만약'에 대한 생각이 들 때면 인터넷에서 기도삽관(아주 아파 보이고 무섭다)이나 코로나 증상 관련 정보들을 찾아보는데 이러고 나면 매우 효과가 있다. 무엇이 어떻든 안 아프고 집에 있는 것만큼 멋진 건 없으니까 말이다.


- 세잔에서 연어 먹기

내 임의대로 세잔이라 적어놨는데 찾아봐도 안 나오는 걸 보면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영수증 사진 찍어놓은 기억은 나는데 말이다. 화가 이름이라고 기억한 게 화근인가보다. 사실은 모네이거나 그런 게 아닐까. 아무튼 이 세잔이라고 적은 곳은 언젠가 다니엘과 갔던 카페인데 작은 호텔에 딸려있는 공간이었다. 오페라 역 근처에서 어찌어찌 갔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있어서 다시 가라면 찾아갈 수는 있는데 여전히 이름만은 기억이 안 난다. 다니엘 왈 진짜 사과보다 맛난 사과주스와 버터 냄새 물씬 나는 빵, 그리고 정말 맛있는 훈제연어가 메뉴에 있었는데 연어로만 16유로면 싼 가격은 아니지만 시험 보느라 그렇게 머리를 혹사했는데 이 정도는 먹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이 '세잔(가명)'이 코로나 이후 망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우리가 좋아하는 다른 모든 레스토랑들처럼 말이다.


- 짜장면 맛집 가서 혼자 짜장면 맛나게 먹기

예전에 친구 부부와 중화요리가 맛있는 식당(아쉽게도 집에서는 좀 먼 편이다)에서 밥을 먹은 적이 있다. 모처럼의 제대로 만든 짜장면이었는데 그날따라 배가 아파서 많이 먹지도 못하고 남겼다. 아직도 이날 못 먹은 짜장면이 자꾸 생각난다. 다니엘은 일이 있다 보니 매일 밖에서 밥을 먹는 게 자연스럽지만 나는 시간도 아낄 겸 집에서 먹는 게 보통이라 나가서 점심 먹고 혼자 기분전환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았다.


- 마라 먹기

나는 위도 약하고 매운맛에도 아주 약하기 때문에 마라를 가까이해도 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주기적으로 마라를 먹어주지 않으면 인간이 침울해지고 삶의 보람이 약해지는 병에 걸렸다. 그런 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로해 주는 것이 집 근처 한인마트에서 파는 오뚜기 마라샹궈였는데 마라의 바람이 어느 순간부터 가시고 말았는지 오뚜기 마라샹궈 역시 짧은 수명을 마치고 자취를 감추었다. 이 마라샹궈에 청경채와 소고기 또는 소세지 그리고 건두부를 넣고 볶아주면 그래도 마라를 접하지 못해 쇠약해진 몸과 마음이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래서 시험이 끝날 즈음 집에 부탁하여 오뚜기 마라샹궈와 귀한 한국산 건두부를 받아 요리해 먹는 것이 나의 크나큰 꿈이었으나 2020년 3월 30일부로 프랑스로 오는 모든 우정이 접수 중지되었다. 하지만 이 주기적인 마라 섭취를 강제로 그만둔 지 한 달여.. 나는 꽤 자주 달고 살던 위염이 깨끗이 자취를 감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근 한 달 내가 원했던 경우를 제외하고 흰죽으로 식사한 적이 없다. 늘 달고 살던 포카리도 깨끗이 끊었다. 하지만 마라를 되찾는 것은 입맛의 주권을 되찾는 것이기 때문에 섭취 빈도를 줄일지언정 끊을 결심을 할 수는 없다. 차라리 (요가보다 더한) 운동을 하고 말지. 마라를 한번 먹고 나면 온 집이 마라 냄새이기 때문에 집에 온 다니엘이 마라의 짙은 발자취를 느끼지 못하도록 몇 시간씩 환기를 했지만 지금처럼 마라를 접할 수 없는 시기에는 그것도 다 그리운 추억이다.


기-승-전-마라였지만 나는 그만큼 마라가 먹고 싶다. 게다가 현시점 나의 단기적 목표는 밖을 나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하루빨리 우정이 정상화되어 고국의 건두부와 국물이 하얀 라면과 신상 과자 등을 맛보는 것뿐이기 때문에 나 정도면 이웃에 귀감이 될 훌륭하고 소박한 시민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날은 점점 따뜻해지고 햇살은 부드러운데 작년 크리스마스에 다니엘이 준 원피스를 입고 함께 나갈 일은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다. 물론 슈퍼에 입고 가면 되지만 말이다. 그건 또 싫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다니엘은 조금 짓궂어졌다. 그는 얼마전에 나를 붙잡고 '니가 맨날 간다간다 노래부르던 동네 (마트 달팽이보다 좀더)고급 달팽이가게 있잖아. 코로나 때문에 거기 망할 수도 있는데 어떡해? 진작 보낼 걸 그랬네. 라고 했다. 사실 코로나가 내게 가르쳐준 건 하나 있다. 맨날 가고싶어했다고 가게가 없어진 다음에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니 관심 가는 가게는 미리미리 가보자는 것.


- 아, 연재를 다시 시작하고 그동안 매 게시물 맨 위에 첨부했던 제목 캘리그라피를 없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캘리그라피에 쓰는 종이를 사러 나갈 수가 없어서다. 화방은 생존에 필수적인 항목이 아니어서 화방은 모두 닫았고, 아마존에서 주문을 해도 안 오거나 우체국(요즘은 매우 드문드문 열고 있다)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있어서 두꺼운 종이를 살 길이 없다. 식량을 사는 동안 도화지를 사는 것도 잊어버려서 도화지도 당분간 쓸 정도밖엔 없지만 지금 있는 도화지를 다 쓸 때쯤엔 뭐라도 변해 있지 않겠는가. 최소한 아마존 배달은 좀 정상화되었으면 좋겠다. 한때 새 물감을 사고싶어서 '이 팔레트에 짜여진 물감을 다 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사서 했었는데 (지금 시국으로는) 다행히도 당분간 물감이 동나서 그림을 못 그리는 상황이 올 것 같지 않다.


집 근처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초록 (남의 건물 화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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