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프랑스어
외국에 정착하러 온 사람들이 비슷한 입장의 사람들을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는 곳은 어학원일 것이다. 아무래도 외국어를 쓰는 사람들이 모이고, 그런 만큼 비자 취득 과정에서 비슷비슷한 단계를 거치고 있을 가능성이 높고, 어학원에서는 언어 실력별로 반을 나누는 만큼 친근감을 느낄 요소들이 더 많다. 나는 어학원은 가지 않았지만 그것 때문에 비슷한 입장의 사람을 만날 수 없었던 적은 없다. 일단 옛날에 회사를 다니면서 만난 사람들이 비슷한 입장에 놓여 있었고, 또 다니엘의 가족 중에서도 나처럼 외국에서 날아와 살고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다니엘의 여동생의 남편이다. 이름은 호세이며 나이는 우리와 같고, 볼리비아에서 왔다.
내가 프랑스에 돌아온 시기와 호세가 프랑스로 온 시기는 딱 2개월 정도의 기간만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만났을 때가 별로 어색하지 않았다. 이야깃거리가 많았고 프랑스어로 대화할 필요도 없었고, 이건 딱히 좋은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내가 다니엘 부모님의 캠핑장에서 선반 위의 소스를 꺼내려다가 양동이를 떨어트려 사달을 낸 지 30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호세 역시 유리잔으로 쌓은 탑을 무너트려 자괴감의 늪을 함께 헤맨 적도 있어 나름대로 동지의식이 두텁다. 덜렁이 동지에 외국인 동지라고 (나 혼자) 생각하고 있다. 각자 가족의 집에서 샤를 드골까지 얼마나 걸리는지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 호세는 17시간, 나는 12시간 정도였다. 다만 호세는 가까운 마드리드에 친척들이 여러 명 살고 있었기 때문에 부러웠다-당시 호세는 다니엘 부모님의 캠핑장에서 다니엘 동생과 함께 일하고 있었는데 이 캠핑장이 스페인 국경과 가까워 다니엘 동생 부부는 가끔 야간버스를 타고 스페인에 다녀오곤 했었다-. 우리는 프랑스어를 배우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와 이 나라가 비자를 주는 데 얼마나 깐깐하게 구는지 이야기했고, 내가 이민청의 건강검진 소환장을 몇 달째 받지 못해 전전긍긍할 때 호세는 자기가 문의한 이민청 직원 번호라도 필요하면 주겠다며 소처럼 순한 눈을 껌벅거렸다.
옛날에 회사를 다닐 적 함께 프랑스어 강의를 듣던 동료들은 한 명이 스페인 출신, 다른 한 명이 멕시코 출신이었다. 둘은 자기가 프랑스어로 말은 못 해도 읽으면 대강 무슨 뜻인지는 안다고 했다. 아마 호세도 마찬가지일 거라 나는 호세가 나보다 훨씬 빨리 프랑스어를 하게 될 거라 믿었는데 작년 크리스마스 이후로 만날 일이 없어 호세가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아무튼 크리스마스 날 우리는 처음 프랑스에 왔을 때에 비하면 꽤 큰 발전을 이루었으나 여전히 어눌한 프랑스어로 다니엘 부모님의 질문에 대답하곤 했다. 우리의 프랑스어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것은 다니엘 부모님뿐이 아니어서, 다니엘의 양가 조부모님도 전화를 하실 때마다 내가 공부를 잘하고 있는지 물어보곤 하시는데 나는 마지막에 (다니엘의) 외할머니 외 할아버지를 뵈었을 때 함께 사는 고양이가 이사 후 얼마나 겁을 먹었는지에 관해 아주 어눌한 설명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을 떠올리며 조금 한숨을 쉬고 다시 신나게 놀았다. 할아버지 댁에 갔을 때 다니엘과 어르신들은 한국의 문화, 정치, 음식에 대해 다양한 대화를 나누었는데 운이 좋아 이번 크리스마스에 그분들을 뵙게 되면 이번에는 내가 더듬더듬 대답해나갈 차례 아닌가. 오.... 나는 조금 아찔해졌다. 가장 최근에 배운 프랑스어는 '우리 조부모님은 전쟁 동안 돌아가셨다(듀오 링고에서)와 '당신한테서 고약한 와인 냄새가 나서 자리를 옮겨야겠어요(옛날에 다니엘 친구가 지하철에서 들은 말)'이다. 오...... 나는 시험이 미뤄지기 전까지 공부를 하다가 또 게임을 신나게 하다가 영상을 조금 편집하다가 글을 다시 쓰다가 요즘은 다니엘이 예전 크리스마스 때 선물해 준 책을 읽는 중이다. 다시 만났을 때 여러 가지 근황에 대해 물어보실 다니엘 쪽 어르신들의 얼굴을 떠올리니 약간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어서 이 책을 끝내고 나면 다시 프랑스어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호세는 정말 좋은 사람이고, 공부를 하면서 호세를 기준으로 삼은 적은 없지만 우리가 비슷비슷한 입장인 만큼 호세가 유창한 프랑스어를 하게 되었을 때 다음으로 기대의 눈길을 받게 되는 건 나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을 때 발등에 떨어진 불이 조금 더 뜨겁게 타올랐다. 학교 다닐 때 '네 베프는 글씨가 그렇게 예쁜데 네 글씨는 이게 뭐니' 나 '네 친구는 그렇게 잘 하는데 창피하지 않니' 같은 말을 들어도 걔는 걔, 나는 나라고 태평하게 엄마의 억장을 무너트렸던 나이건만... 이젠 정말 프랑스어뿐이다.... 내가 말했었나? 프랑스어를 공부하는 유일한 목적은 나중에 공부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
이렇게 약간은 압박을 느끼게 되었지만 호세가 다니엘의 가족이라 정말 좋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호세가 없었다면 내가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고 푸드덕거리고 있을까...? 그럴 리가 없다. 어학원에 다녔다 하더라도, 옆 친구는 붙고 나는 떨어졌대도 그러려니 했을 텐데 상대가 1년에 몇 번은 보는 사람이다 보니 꽤나 생생한 위기감이 든다. 보통은 어른이 되면 느낄 기회가 별로 없는 감정이 말이다..경쟁심도 아니고 질투도 아닌 순수한 위기감이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