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어날 수 없는 늪
오늘 할 이야기는 프랑스 유학이나 거주를 생각 중이신 분들에게 중요할 수 있다. 특히 나처럼 한국에서 평생 살아 많은 것을 한국 기준으로 생각하는 데에 더 익숙한 분들이라면 더욱!
내가 처음으로 취업 준비를 시작한 2014년 경에는 이미 취업을 위해 잘 찍는다고 입소문이 난 스튜디오를 찾아가 취업용 사진을 찍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건 어느 시대든 별로 특이하지 않은 일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취업 준비 기간엔 누구든 다른 이들과 차별화 되는 요소를 갖추고 싶어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배경에 색깔이 있는 증명사진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내가 대학원을 졸업하고도 조금 지난 후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한 4-5년은 된 일이라 생각하는데, 가격은 좀 나가도 아주 예뻐 보였기 때문에 나도 올해 한국에 들어가면 찍어오고 싶다고 마음먹고 있던 터다. 살구색이 좋을까? 말린 장미색으로 테두리를 해도 좋겠지. 나는 한껏 들떠 있었지만 올해 운전면허 교환(한국 면허를 프랑스 면허로, 첫 체류 1년이 지나기 전에 신청하지 않으면 프랑스 시험을 처음부터 쳐야 한다)을 준비하면서 그 예쁜 컬러 배경 증명사진이 이곳에서 얼마나 쓸모없는지 깨닫게 되었다(보통 흰배경 증명사진은 여권 재발급이나 취업에 쓸수는 있으니 논외)
프랑스 행정 기관의 도장 집착증은 유명하다. 도장 집착증이란 즉 우리가 가져가는 모든 서류의 도장이 진짜인지, 아니면 컬러 인쇄된 사본인지 지독할 정도로 집착한다는 의미로-누구는 침까지 발라가면서 도장이 번지는지 안 번지는지 알아봤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한국 경찰서에서 '일본에서 쓸 것도 아닌데 도장이 왜 필요하냐'는 잔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원본 문서에 도장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첫 1년 체류 서류를 준비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는데 운전면허 교환 서류를 준비하면서도 한숨이 폭폭 나왔다. 다른 서류가 다 준비되었음을 확인한 후 한국에서 가져온 증명사진 뒷면에 성, 명, 출생일과 도시를 써넣는 내게 다니엘이 뭘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공증 번역가 선생님이 사진 뒷면에 이거 다 쓰래' 라고 했는데 다니엘이 그 사진은 내면 안 된단다. 프랑스에서 사용할 모든 공식 문서의 사진은 무조건 포토마통에서 찍어오라는 거다.
포토마통은 한국 지하철역에도 있는 간이 증명사진 자판기다. 그렇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 아니고서야 좀처럼 이용하지 않는 그거다. 운전면허는 아마도 프랑스에서 사용할 수 있는 (여권 외의) 첫 신분증이 될 테니 웬만하면 잘 나온 사진으로 하고 싶었던 나는 '하지만 이것도 사진이고 여기 서류에 요구하는 사이즈로 찍은 사진이야.. 도다리 눈알이 아니고서야 이거때문에 서류를 되돌려 보내겠어?' 라고 했지만 나도 다니엘이 하는 말을 듣는 게 이롭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저 현실을 인정하기 싫었을 뿐.. 다니엘은 답답함을 억누르고 찬찬히 설명했다. 아무리 봐도 내가 준비한 사진은 포토마통 사진 질감이랑 다르다고, 나랏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어이없이 서류를 거절하는지 니가 더 잘 알지 않느냐고. 그래서 나는 그 다음날 마지못해 포토마통 사진을 찍으러 집을 나섰다. 머그샷처럼 보이는 것만큼은 피하기 위해 반사판 대용으로 쓰려 준비한 A4용지 한장을 가방에 담고.... 당연히 화장도 하고... 두 번이나 찍었지만 범죄자처럼 보이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데 한국 가면 꼭 찍어야지 싶었던 컬러 배경사진 생각이 났다. 프랑스 사는 한국 친구에게 '근데 나 말야...컬러 배경사진 찍어서 민증 사진도 그걸로 바꾸고 싶었는데 ... 여기 사는 동안은 절대 안되겠네.. 위조 신분증이라고 오해받아서 한국에 반송당하는 수가 있겠어..' 라고 했더니 친구가 격하게 동의해왔다. 아니 내가 사진을 안 찍겠다는 것도 아니고..좀더 잘 나온 사진으로 신분증을 하겠다는데 그게 이렇게까지 거부당할 일이냔 말이다! 하지만 나는 다니엘의 말을 들었고, 그 후에 코로나가 터졌다.. 통상 프랑스에서 한국 면허증을 교환하는 데에는 최소 4개월부터 1년 반까지도 예상을 해야 하는데 코로나가 터졌으니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이 걸릴지는 아무도 모르는 셈이다. 그런데 내가 고집을 부려 한국에서 가져온 사진을 넣었는데 그게 문제가 되었다면... 다시 반송받은 후 또 서류를 준비해서 보내는 시간까지 포함되는 것이니 면허증 하나 교환하는데 2년이 넘게 걸릴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튼 다니엘이 맞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실을 인정하지 못해 쒸익대던 나는 한국 친구와 했던 이야기를 집에서도 꺼냈다. '사실 한국에 이런 사진이 유행하는데 이런 사진으로 민증 하는 사람도 많다. 나도 하고 싶었는데 그랬다간 암만 한국 신분증이라도 프랑스에서 문제가 되겠지?' 라고 했더니 다니엘이 오만상을 쓰고 왜 그런짓을 하냐는 것이다. '난 한국이 만든 많은 것들을 사랑하지만 이 말은 해야겠어. 왜 배경에 색을 넣으려고 하지?' 배경에 색이 들어가는데 어떻게 본인인지 식별할 수 있냐는 것이다. 나는 사진에 들어가는 건 짙은 색이 아니고, 본인인지 식별하는 데 문제가 생길 수준이면 고지식한 공무원 사회가 받아들였을 리 없다고 했지만 다니엘은 강경했다. 그리고 쏟아내듯이 이렇게 말했다. '당연히 프랑스에서 문제가 돼지!! 시청에서는 네가 네 신분증을 위조했다고 생각할 거고 아무도 네 신분증이 진짜라고 믿지 않을 거야. 심지어 나도!' 그래서 나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포토마통과 함께하는 미래를 말이다... 다시 말해 머그샷과 함께하는 미래이기도 하다. 소싯적 잘 찍는 사진관을 찾아 홍대며 강남을 떠돌던 시절의 결실은 아무 쓸모도 없게 되었고 말이다... 한국 서류에 쓰면 되긴 하겠지만.
문제의 컬러 배경 사진을 유학 생활에(국제 학생증이었던 것 같다) 사용했다는 후기가 언젠가 올라왔던 것을 보니 나라 별로 다른 것 같긴 하지만... 나처럼 '한국 신분증이니까 괜찮겠지' 라는 마음으로 컬러 배경 사진을 신분증에 사용할 예정이거나 이미 사용한 분들이 프랑스 생활을 앞두고 있다면 다시 하얀 배경으로 신분증을 재발급받을 것을 권하고 싶다.. 한국 신분증이어도 이 나라에서 언제 어떻게 사용할지 모르는 탓이다. 특히 운전면허증은 원본을 보내 1대 1로 교환하기 때문에(경시청별로 다를 수 있어 확인필요) 더 중요하다. 누구나 5유로로 공식 서류에 들어갈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건 학생들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했을 때 아주 바람직한 일이지만.... 퀄리티는 타협해도 너무 타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