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이런 날이 있냐

이런 날도 있는 거지

by 체리


오늘은 6월 11일 목요일이다. 원래는 경시청에 가서 체류증을 갱신해야 하는 날이나 코로나 때문에 취소되었다. 글을 쓰는 지금은 아홉시가 다 되어가고 있다. 나는 기분을 나아지게 만들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에 저녁을 먹은 후에 나가서 레몬을 두개 사왔고 콜라도 사온 후 집에 있던 멜론 리큐어로 미도리 사워를 오백잔에 낭낭하게 말아서 전부 마셨다. 오늘의 시작은 꿀렁꿀렁거리는 배였다. 나는 아침부터 화장실을 들락날락했는데 크게 긍정적인 성격이라고는 못 해도 요즘 생활 리듬이 크게 나쁘지도 않았던 탓에 이게 오늘 하루의 예고편일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경시청에는 난생 처음 가는지라 한껏 긴장을 해서 열심히 전투화장을 했고 옷도 신경썼다-다니엘은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서류는 원본과 사본을 모두 빈틈없이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전투화장을 마친 후에는 복사를 하러 갔다. 총 30장이 좀 넘는 서류들을 두 부씩 복사해야 했다. 한 부는 보존용으로 집에 남겨놓기 위함이었고 한 부는 사본으로 제출해야 했기 때문이다. 컬러복사라 가격이 좀 나갈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25유로가 나왔을 땐 조금 놀랐다. 나올 수 없는 금액은 아닌데 다른 복사집보다는 확실히 비싸다. 이래서 발품을 팔아야 하나보다 했다. 카드로 지불하려니 어제도 떴던 'paiement refusé(지급 거절)' 메세지가 리더기에 뜬다. 카드 한도는 앱으로 확인을 했기 때문에 한도 때문은 아니다. 은행을 방문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이때까지도 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들이 겹친 것에 불과했다. 기분이 나쁠 것도 없었다. 지갑에 있던 비상용 현금으로 돈을 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면서 샤리오, 바퀴달린 장바구니로 내 앞을 걷던 여자들을 퍽 치고 지나가는 백발의 할머니를 봤다. 할머니가 여자들한테 소리를 질렀다. 왜 와서 부딪치느냐고. 여자들은 할머니더러 먼저 쳤다고 뭐라 했다. 나도 봤다고 한마디 보태고 싶었는데 우물쭈물하다가 집에 왔다.

다니엘과 마지막으로 서류를 점검하고 경시청에 예약을 확인하는 전화를 하는 다니엘을 바라봤다. 좀 기다리라고 다니엘을 대기시키던 전화는 한번 끊겼고 다시 걸은 전화에서 75지역(파리 우편번호 앞자리) 경시청이 15일까지 기능하지 않는다는 걸 전해들었다. '경시청'과 '취소'로 한번씩 메일함을 검색했지만 걸리는 메일이 전혀 없었다. 취소 메일이 없어서 가도 되는 줄 알았는데 역시 취소된 거였다. 경시청에서는 15일까지 연락이 안 오면 15일부터 알아서 인터넷으로 예약을 다시 잡으란다. 내 비자는 6월 말에 만료되는지라 사정을 말하니 '어쩌면' 비자 만료 기간을 감안해서 우선권을 줄지도 모른단다. '어쩌면'이다. 코로나 시국이라 비자 만료 기간에 따라 6개월이 자동 연장되는 경우도 있는데 나는 기간이 맞지 않아 해당되지 않는다. 적지 않은 확률로 정부가 만든 불법 체류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등골이 싸했지만 적어도 이 시국에 이런 상황인 사람이 나 혼자일 리는 없어서 그거 하나는 위안이 된다. 그나마 경시청에 도착해서야 이 상황을 전해듣지 않았다는 건 다행이라면 다행인데. 다니엘이 뭐라고 해도 잘 안들렸다. 정신을 좀 차리고 보니 오늘 온다던 택배 아저씨가 세 번이나 전화를 했다. 22분 전 전화고 알 수 없는 번호로 온 전화라 다시 걸어도 소용없다. 이렇게 경시청도 놓치고 택배도 놓치는구나.

안 자던 낮잠도 자고 밥을 먹고 나니 정신이 좀 돌아오는 것도 같았다. 게다가 다른 택배가 이번에는 편지함에 도착해 있다니, 부리나케 내려가서 가져왔다. 다니엘이 빔 프로젝터를 쓰는 동안 나는 내 일을 할 수 있게 스탠드를 하나 시켰는데 그게 온 것이다. 다만 스탠드는 왔는데 전등갓이 없다. 스탠드 모자는 어디로 갔는가. 다른 부속품은 다 있는데 말이다. 이렇게 또 나는 정신줄을 놓치고 말았다. 지금은 다시 정신을 잡아 반품 수속을 밟고 있지만 말이다. 안그래도 이사온 후로 우편이 정상적으로 오지 않아 불편함이 많은데. 그래도 오늘 일어난 일들 모두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가 명확한 문제들이라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다니엘 말마따나 경시청 문앞까지 가서 다시 집에 가야 한다는 걸 깨닫지 않은 것도. 그렇다고 나아지는 것도 없지만. 답답한 마음에 집을 뛰쳐나와 레몬을 비롯한 마실거리를 사오는 길에는 슈퍼 옆 건물 2층 창문에서 종이로 된 사발면 컵 같은 게 떨어졌다. 크기가 크기인지라 혹시 한국 음식인가 해서 유심히 봤는데 아니었다. 나를 비롯한 행인 몇 명이 오류를 일으킨 게임 캐릭터처럼 창문을 봤다가 컵을 보기를 반복했다. 다시 걸음을 재촉하는 내 앞에 새로이 나타난 아저씨가 짜증난 듯한 목소리로 '이거 창문에서 떨어진 거 맞죠?'라고 물었다. 나는 맞다고 했고. 하루가 무슨 B급 슬랩스틱 영화 같았다. 아이고오 내 25유로 ..

그래도 해결법은 다 알고 있다. 하나씩 해치우면 또 당분간은 평화롭게 생활할 수 있을 거다. 와아~하면 된다.. 아자아자.. 단 하루에 모두 받아내기에는 너무한 포화였다.

- 칙칙한 분위기를 반전시키고자 보태는 다니엘의 더러운 이야기
다니엘은 한 사무실을 쓰는 파스칼과 아주 친하다. 원래는 다른 사람이랑 한 사무실이었는데 파스칼이랑 자리를 바꾸면서 다니엘도 회사 다니기가 (조금) 즐거워졌다. 그런데 재택을 하면서 꽤 오래 못 만났고, 얼마전에 다니엘이 방구를 뀌더니 막 웃길래 나는 뭐가 웃기냐고 -너무 자주 뀌니까 이제는-하나도 안 웃기다고 했더니 파스칼이었다면 엄청 웃기다 해줬을 거란다. 웃기지도 않는 녀석들같으니라고.. 아무튼 이 얘기를 파스칼이 들었는데 파스칼 역시 재택 근무 중에 트림을 거하게 하고 막 웃었더니 여자친구가 똑같은 소리를 했단다. 거기에 파스칼은 다니엘이었다면 함께 웃어줬을 거라고 응수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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