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와 '어'는 다르니까
몇 번인가 약속을 대하는 서로의 차이 때문에 싸웠었다. 꼭 친구들과의 약속이 몇 시간 앞으로 닥쳐서야 내게 얘기해 주는 다니엘이 서운했고, 문화 차이 때문에 우리 둘이 만나기 2시간쯤 전에 다른 친구를 만나고 싶으니 우리는 다음에 데이트하자는 문자를 받았을 때는 분노의 비트에 온몸을 맡겼다. 나나 다니엘이나 옛날에 하던 버릇대로 밀고 나갈 수가 없는 연애여서 많은 부분을 끊임없이 맞춰나간 결과, 같이 살게 된 후에도 형식적으로 '오늘 친구들이 만나자는데, 가도 될까?'라고 묻게 되었다. 몇 시간 전에 갑자기 약속이 생기는 것 자체를 뭐라 하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 전에 잡힌 약속이면 잡혔을 때 알려줘야 나도 다음 주에 뭘 할지 계획하기가 좋다는 게 내 입장이었고, 다니엘은 잘 따라 줬다. 그리고 불만도 표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껏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또 아니었다는 걸 조금씩 깨닫고 있다.
함께 살기 시작한 후부터 '함께 사는 만큼 같이 있는 생활에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라고 생각 했었다. 게다가 다니엘에게 형식적으로라도 약속에 대해 바로바로 알려줄 것을 부탁했으니 나도 똑같이 하는 게 맞다. 그래서 그날 저녁에도 이렇게 물었었다. "라라가 주말에 보자는데, 가도 괜찮지?"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니엘이 불만스러운 콧김을 뿜어냈을 때 조금 놀랐다. "자기야, 몰라... 그건 네 삶이잖아 .. 아 모르겠다." 다니엘이 이렇게 말했을 때는 어 뭐지? 너 또 싸우고 싶은 기간이 찾아온 거야?라고 반사적으로 생각했지만 그런 톤은 또 아니었다. 더 다듬어진 말을 다니엘에게서 캐내야 했다.
"나도 이게 문화적으로 다르다는 걸 알아, 그 차이를 존중하기 싫다거나 그런 마음가짐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야. 네가 말해줘서 나도 안단 말이야. 그렇게 물어보지 않으면 네가 나를 존중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서 네 마음이 불편해질 거라는 거. 그런데 네가 나한테 그렇게 물어볼 때면 내 시각에서는 내가 너를 엄청 속박하고 정서적으로 옭아매는 사람처럼 느껴져서 싫어.. 그 상황 자체가."
조금은 어렵기도 했다. 다니엘은 약속에 허가를 구하듯 하는 말투뿐 아니라 집에 친구를 데려올 때 미리 알리는 내 버릇도 조금 불편하게 생각했으니까. 나는 나대로 '같이 사는 집에 친구를 데려오는데 당연히 네게 먼저 이야기하는 게 맞다'라고 생각했고. 다니엘도 똑같이 해주길 바랐다. 다니엘은 그게 어디까지나 예절 차원이라는 걸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반사적인 불편함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흥미롭게도 본인이 허락을 구하는 상황 자체는 별로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그렇게 묻는 상황이 학대적이거나 어떤 위계질서 하에 놓여 있는 것 같아 거부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래, 난 토요일에 라라를 만나러 가니까 그 사실을 받아들여, 이놈아."
"아니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고... 그냥 나 토요일에 라라 만나러 간다~~ 이렇게."
이 시점에서 나는 '그게 뭐야... 무슨 직장 동료들이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다니엘이 다시 사무실에 나가는 지금 주말의 우선권은 다니엘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라라 엄청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자고 와도 되고. 그러고 싶지 않아?"
"어 그래도 돼?"
"아.... (깊은 한숨)"
"너 그러면 내가 안된다고 할까 봐 자러 간단 얘기 안 한 거야?"
"아니 아예 머릿속에 자러 간다는 플랜 자체가 없었지(일단 라라네 집에서 잔다는 이야기만 몇 번 있었지 실제로 한 적이 없다). 그건 너보다는 라라한테 먼저 물어봐야 되는 거고. 게다가 주말인데 내 머릿속에 우선권은 너한테 있었고."
이런 대화가 오고 갔다. 돌이켜 보면 2년 전보다는 자신이 느끼는 거부감보다 이야기를 하는 데에 집중하게 되어서 우리 둘을 조금 칭찬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어느 쪽이 무조건 맞다거나 우리 사고방식이 100% 문화 때문이라는 생각도 예전보다 덜 하게 되었다. 한국에도 다니엘처럼 생각하는 커플이 있을 테니까.. 그 반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이 대화의 결론은 '나 토요일에 라라를 만날 건데, 어때?'라고 묻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확실히 '그래도 돼?'보다는 부드럽고 문자상에서 느껴지는 위계도 없지만. 다시 한번 다니엘의 생각이 정말 여러 결로 이루어졌다는 걸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비슷한 상황으로 다니엘을 불편하게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계기이기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