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이상했던 한 해로 기억될
우리 가족은 별로 화목한 가족이 아니었다. 그것 때문인지 아버지 세대의 극히 제한되었던 휴가 일수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아마 오빠가 입시 전선에 뛰어든 게 한몫했을 것이다- 어렸을 적 이후로는 가족끼리 놀러 간 기억이 별로 없다. 그 후 취직을 하긴 했지만 6개월 정도 되는 기간 동안 휴가 없이 사는 게 전혀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예전에 말한 것처럼 한곳에서 길게 근무한 적이 없어서 그런 탓도 있을 것이다. 프랑스에 온 후 1년간 일을 했을 때는 한국에 갈 때 쓰기 위해 조금 아파도 휴가를 쓰지 않았다. 역시 바캉스의 나라라서 그런가, 매일 나오고 휴가 기간에 빈 사무실을 지키면서도 사람이 없어서 참 좋다고 말하는 내게 동료들이 별나다고 했었다. 약간은 독하다고 말하고 싶었을까. 살면서 모든 일에 기대 없이 임하는 게 이득이라는 생각이 조금씩 굳어졌다. 기대라는 걸 하면 나만 괴롭다. 이런 철학이 휴가 계획에 임하는 나의 태도에도 녹아들어 다니엘을 뒷목 잡게 만든 적도 있다. 함께한 기간의 상당 부분을 롱디커플로 떨어져 있었지만 사귄 지도 벌써 4년이 넘었다! 그동안 다니엘과 함께 다닌 수많은 여행은 나의 '관심 없는 척'을 꾸준히 허물어 놓았다. 너무 기대하고 설레면 뭔가 잘못될 것만 같았던 손때 묻은 족쇄도 이젠 벗어 버렸다. 총 5주의 유급휴가를 허하는 프랑스인 만큼 다니엘이 회사에 다녀도 1년 동안 둘이 할 수 있는 일은 참 많았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5월이 되면 영국에 살던 치즈 장인 친구를 찾아가서 친구 집에 묵고, 다음에는 한국에 가서 내 친구들에게 같이 인사를 한다는 목표를 세웠는데. 얄궂게도 코로나 사태가 터지지 뭔가.
락다운이 걸렸을 때는 올해는 아무 데도 못 가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휴가는 내되 다니엘은 집에 있고, 락다운 때처럼. 산책도 하고 맛있는 것도 해먹고 그렇게 보내면 되나. 생각을 했는데 어느 날 다니엘이 집에 오더니 다급하게 소리쳤다. "나 8월 1,2주 휴가 써도 된대! 언제 2차 락다운 걸릴지 모르는데 빨리빨리 갔다 와야 해." 그 눈빛에서 이번 휴가를 즐기고야 말겠다는 정열의 불꽃이 보였다. 락다운 기간 내내 억눌린 활동량을 분출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기차 표와 계획표가 준비되어 있었다. 계획은 이랬다. 대중교통 이용은 가능한 범위 안에서 최소화하고, 기차를 타고 발렁스로 간 후 차를 빌려 산속에 있는 다니엘 친구의 고향집을 방문한 후 나머지 일정을 소화하고 다시 발렁스에서 차를 반납하고, 다시 기차로 파리에 돌아오는 일정이다. 파리에서부터 차를 빌려 발렁스까지 갈 생각도 안 해본 것은 아니나 다니엘이 시내 주행에 스트레스를 받고, 차로 발렁스에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기차로 가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덜 걸려 그냥 이 구간은 기차를 타기로 했다.
떠나는 날까지 친구들의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프랑스 남부 사진이 많이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스위스나 이탈리아로 떠나는 사람들이 적지는 않아서 내 주변 친구들도 해외로 가지는 않을까 궁금했는데 다들 이 시국이라서인지 해외여행은 자제하는 분위기였다. 그동안 워낙 바깥 활동을 자제해온 탓에 파리 리옹역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도 가슴이 벌렁벌렁했다. 이런 성수기에 떠나는 건 처음이라서 시간 계산을 잘못했다. 리옹역으로 들어가는 차량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고, 다니엘이 그냥 내려서 뛰어가자고 서두르지 않았으면 기차를 놓칠 뻔했다.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우리 나름대로 활동을 최대한 줄였다. 파리의 회색 풍경이 점점 지겨웠고, 도시를 사랑하는 나도 산이나 들판에 드러누워 도시락이 든 가방을 뒤적거리는 상상을 하던 시점에 떠난 여행이었다. 하루에 5000걸음을 걸으면 많이 걷는 것이었던 생활 패턴이 무조건 하루 만 보 이상의 건강한 생활로 탈바꿈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오랜만에 접하는 맛있는 공기와 빽빽한 자연 때문에 우리는 너무 좋은 나머지 약간 미쳐 있었다.
당초의 계획은 가능하면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는 것이었다. 발렁스에서 더 들어간 라마스트르는 워낙 산속이라 어렵지 않았고, 다음으로 간 님과 아를은 마지막으로 즐기는 도시라 생각하고 사람이 많은 곳만 피하겠다는 마음으로 일정에 집어넣었다. 카시스에서는 호텔부터 휑한 공터에 있는 곳을 잡았지만 칼렁크는 이맘때 가장 붐비는 국립공원인 만큼 사람이 없는 해변을 찾는다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그저 마지막 한 주를 보낼 루베롱과 베르동은 캠핑도 호텔도 아닌 자연 속에 홀로 떨어져 있는 민박을 예약했기 때문에 천장에 난 창으로 별을 보고 생전 처음 라벤더 밭을 찾는다는 행복한 상상을 소중하게 키워나갈 수 있었다.
- 만 역시 인생은 예상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혹시라도 건강이 발목을 잡을까 휴가 몇 주 전부터 일찍 잠자리에 들고 먹는 것도 조심했는데! 까마그에서 제대로 먹은 더위가 우리를 식은땀 흘리게 만들었다. 이후 세웠던 웅대한 계획이 틀어진 건 덤이고. 그래도 이번 휴가만큼 재미있었던 적이 없다. 휴가 전까지 억눌려 있던 활동 욕구가 폭발해서 그런가 이번만큼 미친 듯이 돌아다닌 여행도 없었다. 앞으로 다니엘과 다양한 곳을 여행하겠지만 참으로 이상한 시절, 2파가 와서 2차 락다운이 오기 전에 최대한 즐겨보겠다고 발버둥 친 2020년 여름은 잊기 힘들 것 같다.
- 프랑스에 살다 보면 요즘처럼 하루 확진자가 5700, 6000을 넘어 7000을 넘기는 상황에도 사람들은 대단히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좀 무뎌지지만 하루하루 지뢰 찾기 게임처럼 살아가는 요즘 매일이 불안함 위에 위태롭게 얹힌다는 건 어느 나라에서나 같을 것이다. 모두 건강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