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 없는 대화

낯설어진 (구)노멀

by 체리

언젠지 잘 기억도 안 나는 옛날, 일본에 갔을 때 모 역의 JR 역사와 신칸센 역사가 한참 떨어져 있는 걸 모르고 신칸센 역사 앞에서 타는 버스를 예약했다가 낭패를 볼 뻔한 적이 있다. 휴가 첫날 발렁스에 내렸을 때도 같았다. 우리는 발렁스 TGV, 테제베 역에서 차량을 수령해야 했는데 정작 우리가 내린 곳은 그냥 발렁스 역이었다. 결국 택시를 타던 기차를 타던 해서 발렁스 TGV 역까지 가야 했는데 이놈의 택시가 안 잡히는 것이다. 다니엘 친구인 아멜리네 고향집을 방문하기 위해 내린 이 역에서 우리는 작열하는 더위의 무서움을 느꼈다. 허벅지를 제외하면 땀이 별로 안 나는 편인 나도 5분 만에 송골송골 땀을 흘릴 만큼 해가 난 곳의 온도는 엄청났다. 20분을 멍하니 서있어 봤지만 택시 정류장은 본 용도보다 마중 나온 사람들과 여행객들의 만남의 장으로 더 유용히 쓰이고 있었다. 우버는 검색해봤자 아무 결과도 뜨지 않았고. 그럼 남은 건 기차인가? 싶던 차에 다니엘이 버스를 타야겠다고 했다. 기차는 시간표가 너무 애매했던 탓이다. 발렁스 TGV 역에서 차량을 수령하는 과정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다만 막 수령한 차가 잘 나가지 않아 다니엘을 당황시켰다.


올해 여행을 함께한 르노 캡쳐
산불

밖에 가만히만 서있어도 다리가 타들어가는데 차 안은 오죽했을까, 땀이 많은 다니엘은 아까부터 옆머리가 완전히 젖었다. 에어컨을 켠 후에도 계속 땀을 흘려서 내 자리에서 손이 닿는 왼쪽 얼굴은 땀을 닦아줄 수 있었지만 오른쪽은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언젠가 내가 산에서 쓰레기 태우는 연기를 보고 다니엘아!! 저기 산불 났어!!라고 호들갑을 피워서 웃음거리가 된 적이 있었는데 이날은 진짜였다. 아멜리네 고향집이 있는 라마스트르로 가는 동안 산불을 발견한 거다. 알고 보니 산불은 뇌우와 더불어 라마스트르에서는 흔한 일이란다. 차가 전에 몰던 차와는 좀 달랐는지 다니엘이 손에 익지 않는다며 긴장했다. 나는 점점 올라오는 멀미 기운에 별 말 하지 않고 손잡이를 더 세게 잡았을 뿐이다. 다니엘의 부모님이 사는 르마스다질 역시 산속 국립공원에 있는 탓에 꽤나 꼬불꼬불한 길을 달려가야 하는데 산길은 어디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라마스트르로 가는 내내 나는 토기를 참느라 고생해야 했다. 하지만 이것 또한 멀미인의 숙명이다. 파리에서 발렁스로 오는 두 시간 동안 멀미 없이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이미 감사할 만한 일이었다.

까칠한 매력의 JO

하마터면 아멜리네 고향집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놓칠 뻔했다. 길을 찾느라 아멜리와 통화하는데 아멜리가 경적을 울려 보란다. 우리 차 경적 소리가 아멜리의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그렇게 도착한 집에는 아멜리네 고양이 J.O(올림픽 기간에 데려와서)와 라그나(당시 바이킹 시리즈를 열심히 봐서), 그리고 옛날에 아멜리와 다니엘과 함께 아이슬란드를 여행했던 에스텔, 그리고 아멜리의 부모님이 계셨다. 에스텔은 아멜리와 중학교 때부터 같은 학교를 나왔고, 다니엘과는 아이슬란드 여행에서 친해졌다고 했다. 에스텔은 이 집에 자주 왔기에 뭐가 어디에 있는지까지 잘 알았고, 다니엘 역시 두 번 정도 이 집에 와본 적이 있어서 다들 내가 쓸쓸해하지 않게 많이 신경 써주는 기색이었다. 아멜리의 부모님은 파리에서 한 번 뵌 적이 있어서 아주 낯설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처음 만나는 거였지만 에스텔이 서글서글한 성격이어서 안심했다. 아멜리 동생 방에 짐을 풀었고, 집안에 저녁으로 먹을 라따뚜이 냄새가 가득했다. 매번 여행 때마다 이동거리가 제일 긴 첫날이 가장 고생스러운데 이 날은 산길에 멀미를 했지만 나름 가벼운 수준이라 다행이었다. 몇 주 전부터 컨디션 관리를 한 보람이 있다.


온 마을에 붙어있던 몬스터 트럭 쇼 포스터
다양한 지역 치즈

짐을 풀자마자 에스텔의 차에 타고 호수로 갔다. 이때부터 여행을 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 많은 사람들 중 마스크를 낀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 우리는 비교적 사람이 없는 위쪽 둑으로 올라갔다. 비치타월 위에 앉아 마스크를 벗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니 마스크 없이 사람을 만났던 게 아득한 옛날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아멜리의 고향 집에 짐을 풀 때까지만 해도 마스크 없이 사람들과 인사하는 게 조금 낯설었는데 말이다. 깨끗한 공기를 아무 저항도 없이 들이 마시는 것과 자연을 즐기는 것 모두 너무 오랜만이었다. 엔도르핀이 막 돌아서 그런가 첫날부터 미친 듯이 활동을 했는데도 피곤하지 않았다-이 엔도르핀의 가호는 여행이 끝나기 4일쯤 전부터 사라지기 시작한다- 사람이 넷이지만 수영을 못 하는 건 늘 그랬듯 나뿐이었고 ... 다니엘이 가르쳐줘서 어느 정도 흉내는 내게 되었지만 깊은 곳에서는 다니엘의 등에 매미처럼 꼭 매달려 있었다. 셋이 다이빙을 하고 싶다기에 그들을 보내고 나는 강둑에 벗어둔 샌들이 신경 쓰여 다시 위쪽 둑으로 올라갔다. 신발이 없으면 맨발로 차까지 걸어가야 하는데, 좀 더 한적한 곳에 벗어둘 걸 그랬다. 위로 올라가는 길에 짬짬이 개구리 영법을 연습했다. 귀여운 꼬마가 물가에 있었지만 괜히 꼬마에게 친한 척을 했다가 보호자를 불편하게 만들기는 싫었기 때문에 외면하려 했는데 꼬마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자기 돌 좀 보라고. 엘사 양동이 속에 돌이 많이 있었다. 와~ 많이 있다!라고 하고 다시 신발을 찾으러 가려는데 아멜리가 먼저 나를 불러 세웠다. 알고 보니 꼬마의 부모님과 아멜리가 같은 학교 출신이지 뭔가. 와, 아멜리의 동창이면 나와 동갑인데 벌써 부모님이라니. 꼬마가 내게 자기 돌을 쥐여주더니 또 풀을 꺾어 쥐여줬다. 혼자 놀다가 누구라도 말상대가 생기니 좋았던 것 같다. 돌과 풀은 내게 주는 건 줄 알았는데 조금 있더니 다시 뺏어간다. 제멋대로다. 꼬마는 물고기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자꾸 돌만 주워다 양동이에 담았다. 안 잡은 세월이 더 길지만 일단 산 옆에서 태어나 송사리로 페트병을 채운 가닥이 있기 때문에 송사리를 하나 잡아줬더니 꼬마의 눈빛이 조금 존경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뀌었다. 때맞춰 올라온 다니엘까지 합류했다. 더 많이 잡아주고 싶었는데 왼쪽에는 꼬마가, 오른쪽에선 다니엘이 움직이고 주변에 사람이 있다 보니 고기가 한쪽으로 몰리지 않았다. 원래 이런 건 혼자 있는 듯 없는 듯 고기들을 방심시켜야 잘 잡힌다. 결국 수확은 두 마리에 그쳤다.



돌아갈 준비를 하는데 꼬마, 니나가 와서 나한테 돌을 줬다. 나한테 '좋은 친구'라고도 했다. 아무리 상팔하팔이라지만...좀 너무 어려도 첫날부터 친구가 생겼으니 나쁘지 않다. 이 돌은 잘 가지고 다니다가 집에 가져왔다. 집에 돌아와 아멜리의 아버지에게 니나가 돌을 줬다 했더니 아멜리의 아버지가 그 꼬마는 물고기를 참 좋아한다고 했다. 취향 저격이었던 건가. 더 잡아주지 못해 유감이었다. 이 전날 아멜리 아버지(수의사)의 일은 뇌우로 죽은 소의 주인에게 보험에 낼 확인서를 작성해 주는 것이었다. 당연히 죽은 소의 시체를 보고 사인을 확인해야 했는데 그 사진이 아멜리 아버지의 핸드폰에 있었다. 에스텔과 아멜리는 이미 처참한 시신을 본 상태였고 다니엘이 먼저 사진을 보더니 보지 말라고 나한테 손을 휘휘 저었다. 약간 고어 취향인가.. 에스텔과 아멜리 아버지는 저녁을 먹기 전까지 죽은 소에 관해 이야기했다. 아멜리 아버지가 바비큐 그릴을 꺼내 캐러멜 돼지고기를 만드는 동안 우리는 테이블 만드는 일을 도왔다. 마스크나 코로나가 주는 공포의 얼룩 없이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게 여전히 이상하면서도 너무 기뻤다.


저녁은 엄청났다. 라따뚜이에 감자튀김, 그리고 꿀을 뿌려 구워낸 돼지고기 다음으로는 다섯 종류의 치즈, 마지막으로는 쿠키와 차로 입가심을 했다. 우리 집은 손님을 거의 받지 않았기에 프랑스의 이런 손님맞이는 늘 나를 놀라게 했다. 에스텔이 이 집의 또 다른 딸이라고 해도 놀랍지 않을 만큼 아멜리의 부모님과 친밀하다는 것도, 이 장소에 모인 사람들이 개인사나 직업 얘기보다는 관심사에 관한 이야기를 훨씬 더 많이 한다는 사실도. 고양이 J.O는 까칠하기로 소문난 녀석인데 이상하게 나를 좋아했다. 아멜리가 한 손으로 J.O를 안아들면 나이 든 J.O의 짧똥한 피클같은 몸매가 두드러져 보였다. 라그나는 생각보다 훨씬 수줍어해서 절대 손님들이 있는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동화 일러스트를 떠올리게 하는 그 집에서 나는 낯선 설렘을 안고 잠들었다. 여행이 시작됐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