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말랑한 마음

왜 이렇게 잘해주시나요

by 체리

* 딴 얘기지만 내 평생 말랑은 젤리나 아기 피부나 갓 쪄낸 호빵 같은 데에 쓰는 단어였는데 프랑스어에도 말랑(malin: 꾀돌 꾀순이들한테 똑똑한데,,? 천잰데..? 라고 할 때 쓸 수 있다)이 있지 뭔가. 하지만 제목의 말랑은 우리의 그 말랑이 맞다.

내가 살다 살다 남자친구의 여사친의 부모님 댁에서 아침을 맞다니. 그것도 아직 만나본 적 없는 남자친구의 여사친의 남동생 침대에서(그의 방에서 다니엘과 묵었으므로) 말이다. 이게 무슨 할리우드 간판 부서지는 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이 집에서 지내는 것이 전혀 불편하지 않아 이 기묘한 상황에 대한 의문은 불씨 수준에서 소멸했다. 아멜리의 부모님은 정말 잘 대해주셨다. 라마스트르의 아침은 유난히 많은 꿀벌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전날 밤에도 벌들이 너무 달려들어 저녁을 먹는 게 힘들었는데(이 땐 아무래도 꿀을 뿌린 돼지고기의 매력적인 향기가 원인이었나 생각했다) 아침은 더하지 뭔가. 어느 나라나 산속 마을은 벌레 곱빼기와 동의어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살았다. 그 전날 밤 내 머리 위로 떨어진 중지만 한 방아깨비의 섬뜩한 무게감은 또 어떻고(나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아멜리가 올해는 유난히 벌에 쏘인 사람이 많았다고 했다. 그녀 역시 올해 여름 쌍살벌에 쏘인 자국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아멜리가 네스퀵 탄 우유에 바게트를 적셔먹는 동안 다니엘과 에스텔이 아침부터 밥맛 떨어지는 메뉴를 먹는다고 놀려 댔다. 차와 버터 바른 바게트로 아침을 해결하는데 J.O가 와서 내 다리에 몸을 부볐다. 나이 든 고양이의 숙명이다. 햇살 속에서 J.O의 건조한 털들이 벚꽃잎처럼 날렸다. 지난번 포스트에서 라마스트르의 번개 때문에 소가 여럿 죽었다고 했었는데, 이 마을 출신인 아멜리와 에스텔이 진지한 얼굴로 오늘은 5시부터 뇌우 경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일찌감치 호수에 가서 보트를 빌려 놀고 뇌우가 오기 전에 집에 돌아올 거라고 했다. 이 녀석들, 바캉스에 진심이구나! 어제는 에스텔이 운전을 했지만 오늘 운전대를 잡는 것은 다니엘이다. 아이슬란드에서도 이렇게 번갈아 가며 운전을 했겠지. 내가 상상한 것은 유럽 갬성의 로드트립이었지만 셋이 말해준 아이슬란드 여행은 여행 내내 씻지 않은 누구 씨 이야기와 끔찍했던 음식, 그리고 운전 중 급똥 시 찾아갈 곳이 언제 나타날지 모를 캠핑장 뿐이라는 대자연 속의 절망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었다.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나니 나는 아이슬란드에 가고 싶지 않아졌다.

라마스트르의 자연

아멜리의 안내를 따라 호수를 찾아 떠났다. 중간에 아멜리가 다니엘에게 지금 경적을 울리라고 해서 아무도 없는 길에서 경적을 몇 번 울렸다. 내가 왜냐고 물었다니 아멜리가 대답했다. 우리가 지나친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예전에 잠시 정차했던 아멜리 아버지의 차에 가까이 와서 당장 여기에서 꺼지라고 위협을 했단다. 나와 다니엘도 예전에 다니엘 부모님의 집 주변에서 비슷한 일을 겪었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가 갔다. 아멜리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저 사람들 지금쯤 신경증에 단단히 걸렸을걸, 내가 지금까지 네 대의 차(아버지 차, 아버지의 업무용 밴, 에스텔 차, 다니엘의 렌터카)로 여길 지나갈 때마다 경적을 막 울려댔으니까 말야. 그냥 정차만 해도 난리 치는 사람들인데 아무도 없는 여기서 경적 울리는 차들 때문에 당황 좀 했겠지."

인간 네비게이션 아멜리의 길안내는 정확했다

나는 꽤 괜찮은 복수라고 생각했지만 곧 구불구불한 길 때문에 올라온 멀미가 생각을 막았다. 세 사람은 이날 아침부터 호수에 가면 미끄럼틀이 달린 페달보트를 빌리자고 장밋빛 미래에 대한 꿈을 심어줬는데 그렇게 토하기 직전까지 구불구불한 길을 달려서 도착한 호수에는 미끄럼틀 보트가 모두 나가고 보통 보트만 남아있었다. 차 안에서 아멜리는(예상했을지 모르겠다. 우리 중 가장 전투력이 높다) 럭비맨들과 캠핑장에서 싸운 얘기를 했었는데 럭비 불모지인 남한에서 날아온 나는 럭비맨이 어떤 이들인지 그려내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마침 호수에 우리가 염원하던 미끄럼틀 페달보트를 타고 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몸집이 유난히 뽀빠이처럼 두껍고 튼튼해 보였다. 헬스 근육이 아니고 효도르 같은 빵빵한 근육이었다. 아멜리가 그들을 가리키며 '저게 럭비맨이야'라고 했다. 저런 놈들과 싸울 생각을 하다니. 여간내기가 아닌 줄은 알았지만 아멜리한테 까불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슬란드 여행 내내 아멜리의 의견에 나머지 둘이 끌려다닌걸(딱 한 번 싸워서라도 자기들 하고 싶은 걸 해보려고 했는데 결국 둘이 아멜리한테 졌단다) 보면 에스텔과 다니엘은 오래된 우정인 만큼 이 사실을 훨씬 더 예전에 깨우친 것 같았다.

오른쪽 윗줄의 초록색이 미끄럼틀 달린 보트

이날도 구명조끼를 입은 건 네 명중에 나뿐이었다. 호수에는 사람이 많았지만 마스크를 챙겨 쓴 사람은 우리 넷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가게 안만 아니면 쓸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호수(Le Lac-d'Issarlès)는 내가 프랑스에서 가본 호수 중에서도 손에 꼽히게 깨끗하고 시원했다. 맑은 물속에 꼿꼿이 선 채로 아래를 보면 내 발끝까지 다 보였으니 말이다. 아멜리가 이 호수의 중앙에 에펠탑을 담그면 2/3 정도만 물 밖으로 나올 거라 했다(호수 최대 수심 138미터). 두 달 동안 집에만 갇혀서 있었던 락다운 기간과 매일 수영하러 호수에 가는 지금의 생활이라니. 올해는 대조가 너무 극명하다. 너무 오래 있다가 번개를 맞고 싶지 않았던 우리는 보트를 반납하기로 했다. 다니엘이 수영으로 보트를 따라잡겠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하길래 아멜리가 키를 잡고 뒤에서는 다니엘이 미친 듯이 헤엄쳤다. 아무래도 인간이 보트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다니엘이 졌는데, 이후 아멜리는 헤엄치는 다니엘에게 장난을 치려다가 내 남자친구를 죽게 할 수는 없어서 참았다고 했다. 나는 무슨 장난을 치려고 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아마 다니엘이 힘들어서 못 하겠으니까 다시 태워달라고 했을 때 더 약 올리면서 보트를 더 몰고 가는 장난을 얘기한 것일 거라 짐작할 뿐이다. 정말 무서운 아이다.

이 동네의 명물은 블루베리와 밤 아이스크림인 모양이었다. 깃발이 여기저기 꽂혀 있었다. 물놀이 이후라 찬 음식을 먹어 체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볼로네즈를, 나머지 세 사람은 샐러드를 주문했다. 다니엘이 자꾸만 물었다. 정말로? 이 더운 날씨에 뜨거운 볼로네즈를 먹어야겠냐고. 어쩌겠나, 난 물놀이 후에는 꼭 육개장 컵을 먹어줘야 하는 사람인 걸. 게다가 성질이 급한 나는 국밥처럼 대량으로 소스를 만들어놓는 볼로네즈라면 빨리 나올 거라는 계산을 깔고 이것을 주문했는데 아무래도 웨이터가 우리 주문을 잊어버린 모양인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시간이 지나서야 음식이 나왔다. 작년 여행에서 당한 게 많았던 나는 Hoxy... 지금 이 동네의 거의 유일한 동양인 때문인가..라고 생각했지만 다행히 그런 기색은 아니었다. 음식이 나오자 다니엘이 '이상하게 지금 니가 부러워'라고 말했다. 그 말대로 볼로네즈는 맛있었다!

엄청났던 비와 번개

돌아오는 길은 재난 영화를 방불케 했다. 한순간에 몰려온 비바람과 구름이 그 많던 사람들을 한꺼번에 떠나도록 만들었으니. 밥을 먹은 후 배불러 호숫가에 퍼져있는 나와 다니엘, 에스텔을 뒤로하고 아멜리는 다시 수영을 하러 갔다. 하늘은 이미 시커먼데 아멜리가 나오지 않아 우리는 좀 걱정했다. 세상에..아멜리가 죽을 거야... 에스텔과 다니엘이 중얼중얼 거렸다. 하지만 아멜리도 심상찮은 하늘을 보았는지 철인처럼 빠르게 헤엄쳐서 뭍으로 돌아왔다.

양말바람으로 잘 다니는 다니엘

미친듯한 빗줄기가 완전히 시야를 가렸던 이 날은 새 일자리를 구한 에스텔이 마르세유로 떠나기 전날이었다. 다들 마르세유의 운전 방식이나 치안에 대해 한마디씩 농담을 던져 댔다. 그리고 이틀 후 나와 다니엘이 님으로, 아멜리가 아이슬란드로 떠난 후 에스텔로부터 벌써 누군가가 길가에 세운 에스텔의 차를 해먹었다는 연락이 도착했다. 불쌍한 에스텔. 아무튼 이 날 저녁은 엄청났다. 차갑게 식힌 라따뚜이와 어머니의 특기인 찐득한 감자 그라탕, 지역 소시지 두 종류. 그리고 전날 내가 관심을 보였던 페코동 치즈가 2,4, 10일 숙성 기간별로 늘어서 있었다. 오랜 친구인 에스텔이나 이미 몇 번 방문했던 다니엘에 비하면 나는 깍두기인데 말이다.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다니. 감동적이었다. 아버지가 후식으로 가져다주신 초콜릿 / 카시스(블랙커런트) / 밤 / 망고/ 바닐라와 라즈베리 젤라또를 취향껏 떠먹은 후에는 정말 식사가 끝났겠거니, 마음을 놓고 있었지만 여기는 프랑스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또 빙긋 웃으시며 아침에 시장에서 사 오신 쿠키를 가져오셨다. 아이고 ... 성장하는 내내 할머니 사랑이라고 할 만한 것을 별로 받아보지 못해서 그런가. 보통 할머니 댁에 가면 이런 거겠지 생각하니 감동이 밀려왔다. 호르몬 때문이었나. 아니, 파리에서 한번 뵈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잘 해주시는 마음을 느끼면 감동받을 수밖에. 이 두터운 정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다니엘 할아버지 댁에 갔을 때도 그렇고. 이런 시간은 사람 마음을 참 말랑말랑하게 만든다.

엄청난 맛
감자 그라탕은 며칠 더 머물면서 배우고 싶을 정도였다
숙성기간별로 줄 선 페코동 치즈
나는 초콜렛과 밤 맛을 골랐다
젤라또의 위엄
아멜리 부모님 픽 치즈
맛있게 생겼지만 미묘했던 음료수
식힌 라따뚜이의 재발견. 여름에 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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