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싫어해도 되겠습니까

조금만요

by 체리

그 옛날 버킷리스트에 '프랑스어 배우기'를 적어 넣었었다. 관심 영화 목록에 저장해놓고 한 번도 안 본 아멜리에, 그리고 지금까지 본 공드리 영화 덕분에 프랑스어 자체에 환상이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요즘 힘들지만 그래도 즐거워!!라는 성취감에 젖어 있어야 마땅할 텐데... 그렇지가 않다. 단순히 프랑스어가 '필요'의 영역에 와서 그런 것만은 아니더라. 성취감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RFI 라디오를 들을 때마다 마치.. 여러 줄의 문장을 차곡차곡 구겨 한 번에 내 귀로 던지듯 빠르게 말하는 출연자들의 음성을 들으면 울적해진다. 내가 요새 사춘기인가 보다. 과연 나는 고 3 최후의 날, 광기에 젖어 수능특강 책을 폐지 컨테이너에 집어던지러 내려갔던 그때처럼 프랑스어 책들을 내던지는 쾌감을 느낄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올까? 와야만 한다. 이 짓을 평생 할 수는 없다. 지금 하는 꼴을 보면 평생 하게 되긴 하겠다만..

영어도, 일본어도 들이는 노력에 비해서는 빨리 늘었다. 평범한 학창 시절이었지만 잘 하는 게 있다는 생각은 자신감을 불어넣어 줬다. 때문에 나는 언어에 자신감이 있었다. 프랑스어... 너와 만나기 전까진. 언젠가 주방 테이블에 머리를 쿡쿡 박으며 '스페인어 하고 싶어... 나 ㄹㄹㄹㄹ(스페인어 R) 발음은 되게 잘한단 말이야..'라고 했더니 다니엘이 단호하게 그러면 스페인 남자친구 찾으라고 했다. 너무한다 진짜. 아니 진짜로. 만약에 다니엘이 스페인 사람이었다면 지금보다는 빨리 늘었을 거라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불평을 하다가 얼마 전에 대학 시절 몽골 교양에서 몽골어를 보고 저건 절대 못하겠다고 생각한 것이 떠올라 인터넷에 몽골어를 검색했다. 그나마 알파벳이라도 알고 있는 프랑스어가 더 선녀같이 느껴졌다. 그러고 나서 태국어에는 성조가 세 개도 아니고 다섯 개가 있다던 게 떠올라 태국어 알파벳을 검색해봤다. 알파벳만 배우는 데에도 1년은 거뜬히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지금 하는 거나 열심히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프랑스어.. 어차피 해야 하는 이 언어가 왜 이렇게 버거운가 오늘 생각을 해봤더니 이유는 이랬다.

- 덕질할 거리가 없다
덕질할 거리가 ...정말 없다... 축구 덕후라면 프랑스에 살면서 다양한 팀도 응원하고 또 다른 덕후들과 교류하면서 꽤 즐겁게 생활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스포츠를 싫어하고.... 그나마 취향에 맞았던 건 스캄 프랑스였는데-다니엘은 계속 스캄 그거 프랑스가 '만든'거 아니라고 뭐라 했지만 현지화라도 된 덕질 거리를 구하는 게 이미 어렵다- 그렇다고 몇 번씩 볼 정도로 빠진 것도 아니다. 돌이켜보면 영어와 일본어를 이어나가게 한 가장 큰 힘이 덕질이었거늘... 좋아하는 프랑스 노래는 딱 세 곡이고. 영화도 한번 보면 그만이다. 고육지책으로 당나귀 트로트로를 보긴 했다만 정신건강에 조금 도움이 되는 것을 빼면 그저 그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프랑스 음식에 관한 이야기만은 언제 봐도 재미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 일본 만화 시장이 생각보다 엄청나게 커서 한국에도 정식 발매되지 않은 만화를 프랑스어로는 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우회적으로는' 덕질을 할 수 있다. 더빙 시장은 크니까 말이다. 좋아하는 영화가 프랑스 영화가 아니더라도 더빙판을 찾으면 되니까. 이 풍요로운 인터넷 시대에도 사정이 이런데 10년 전이나 20년 전에 프랑스에 오신 분들은 어땠을까 생각하면 조금 숨 막힌다. 작년에는 나도 긍정의 기운에 푹 취해 '우리는 길을 찾을 것이다'를 외쳤지만 길 같은 것은 없었다. 덕질에 한해서는. 나는 공드리를 꽤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내가 보고 싶을 때 보는 공드리가 좋은 거였지 프랑스어를 공부한다고 공드리를 일주일에 열 번씩 틀어놓고 싶은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 어학 시험공부랑 실제 생활의 간극이 적지 않다
B1이란 무엇인가. 나는 올해 5월에 B1을 봤어야 했지만 락다운으로 한두 번 미뤄지고 또 주최 측 실수로 한 번이 더 미뤄지면서 + 언제 두 번째 락다운이 와서 국경이 닫힐지 몰라 한국으로 와버린 상태이므로 진작 봤어야 할 시험을 아직도 안 봤다. 그러나 B1 공부를 너무 오래 해버린 나머지 델프 B1이면 어떤 레벨인지는 너무 잘 알게 되었다. B1 이란... 그저 택배 아저씨와 가벼운 수다를 떨 수 있는 정도. 또한 은행에 가서 간단한 업무를 해결할 수 있는 정도. 뭔가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있지만 대화가 깊어지면 더 이상 감당을 못 하게 되는 정도. 또 뭔가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과 그 이유는 설명할 수 있지만 무작위로 선택되는 모임의 대화에서는 길을 잃고 마는 정도의 어학 수준인 것이다. 하지만 내가 B1 만 따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 생각한 것은 아니며 내가 말한 어학 공부와 실제 생활의 간극은 이런 게 아니다.
이놈의 언어. 억양과 빠르기에 있어 변수가 너무 많다!!! 나라부터가 크고 프랑스 밖에도 프랑스 영토거나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나라들이 있다. 말은 또 어찌나 빠른지... 전화를 거치면 더 어려워지고 말이다. 중요한 항의 전화를 할 때는 해야 하는 말을 일단 숙지하고 전화를 하는데도 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슬퍼진다.

- 한국 교재나 강의가 실제와 다른 경우가 꽤 있다.
한국이 얼마나 일본어, 중국어, 영어 교육을 주로 다루고 있는지 프랑스어를 공부하기 전까지는 실감해본 적이 없다. 아마 이 문제가 훨씬 심한 언어도 많을 거라 생각한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내가 가진 한국 교재 중에는 떡하니 표지부터 철자 오류가 있는 책도 있었고, 내가 뭔가를 달달 외우고 있으면 다니엘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그런 단어는 어디에서 배웠어? 아무도 안 쓰는 말인데?'라고 할 때도 제법 많았다. 락다운 기간에는 인강을 들었는데 인강에서 들은 용법대로 작문을 했더니 다니엘이 '이 사람들이 대체 너한테 뭘 가르치는 거니'라면서 그 용법은 다시는 쓰지 말라고 하기도 했다. 한국 책도 한국 책이지만 프랑스 교재에서 발견되는 오류도 가끔 있단다. (프랑스에서) 교재를 사려고 아마존을 뒤지면 마지막 개정본이 2012년이나 2014년에 만들어진 건 흔한 일이고... 매번 실감하는 건 틀린 거라도 그냥 통째로 외우는 게 낫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고치는 순간이 오더라도 일단 이 부분은 넘어갈 수 있으니까.


한국 와서 공부하려고 공항에서 르몽드 디플로마틱을 샀다.

- 같은 발음의 다른 단어들이 정말 많다.


설명은 짤로 대체한다. 이것 때문에 받아쓰기 하다가 한숨이 나올 때가 참 많다.

전부 다 '에'로 발음되는 친구들의 모임
성 아니면 송으로 발음되는 친구들의 모임

그래도 나도 모르는 새에 프랑스어가 늘어 있을 때, 전에는 하던 실수를 안할 때, 예전에 틀렸던 문제 맞을 때, 오늘은 왠지 받아쓰기가 잘 들릴 때. 느껴지는 성취감이 느려도 꾸준하게 등을 밀어준다. 특히 이걸 다 하고 나면 스페인어는 (동사변화는 안 해도 되니까) 훨씬 쉽게 느껴질 거라는 사실도 나름대로 동기부여가 되고. 프랑스어를 공부하는 솔직한 목표는 '더 이상 프랑스어를 공부하지 않기 위해서'이지만 이 언어가 그동안 만난 어떤 과목보다 노력을 요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고등수학: 시원하게 포기했음) 내가 정말. C1까지만 가면 정말 프랑스어 손 뗀다 정말.

- 체리가 한국에 있기 때문에 저도 메시지로 받은 다니엘 소식: 프랑스 국세청은 다니엘에게 메일로 이런 내용을 보냈습니다. '아!!! 우리 너한테 2019년 세금 걷는 걸 까먹었다. 그러니까 2020년에 세금을 두 배로 내도록.' 그래서 다니엘은 올해 알토란처럼 모은 저금을 모두 빼앗겼습니다. 아아..... 아... 다니엘이 얼마나 그 저금을 뿌듯해했는지 알았기 때문에 차마 드립도 칠 수 없었어요 ..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