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탕아의 김치축제 후기
나는 91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나와 같은 세대이거나 더 나이가 있는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98년 말까지 한국은 일본 문화를 드러내놓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몰래 찍어먹는 꿀단지가 더 단 심리도 있었을 것이고, 내가 어렸을 적에는 실제로 일본 드라마가 그 전성기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롱 베케이션, 런치의 여왕, 춤추는 대수사선, 히어로, 고쿠센, 꽃보다 남자.. 셀수없는 드라마들이 내가 10대이거나 그보다 좀 더 일렀을 때 제작되었다. 나는 나보다 먼저 일본 문화를 접한 사촌들과 오빠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일본 문화에 흥미를 가졌다. 부모님은 기본적으로 한국 드라마를 더 좋아하셨지만 부모님 마음속의 극장에는 늘 홍콩 영화가 있었다. 당시 그것들은 어떤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보였다. '아무리 우리가 잘 만들어도 홍콩 영화는, 일본 드라마는 또 못 넘는다'는 마음이 어느 정도는 있었다. 나는 그렇게 느꼈었다.
나는 정확히 '가을 동화', '겨울 연가', '여름 향기'를 거치면서 한국 드라마에도 열광하기 시작했다. 아마 이때가 일본에서 실감하는 1차 한류였을 것이다. 나는 어렸지만 이때의 '한류 열풍'이 오래 갈 거라 생각지 않았다. 그야 그럴 것이 TV에 일본 한류 관련으로 나오는 영상 속 팬들은 다 엄마나 할머니-당시 내가 10살 좀 넘었을 때였기 때문에- 연배로 보여서 그렇게까지 멀리 갈 수 있는 현상처럼 와닿지 않았던 것이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쟈니즈 소속 아티스트나 일본 락밴드 음악을 많이 들었다. 한국 음악은 남들 다 듣는 걸 듣기 싫다는 삐대한 마음으로 아일랜드시티,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같은 소위 홍대 뮤지션들 음악만 골라들었다(홍대병이라는 말은 내가 대학교를 졸업할 때쯤 생겼다 당시엔 이 말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지 뭔가). 그렇다고 한국 문화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집에서도 월화, 수목, 그리고 주말 드라마까지 빼놓지 않고 달릴 때도 있었지만 내 성장 과정에서 스스로 '내 문화'가 주류라고 느낀 적은 전혀 없다 단언할 수 있다. 게임 분야는 이미 일본이 다 해먹고 있었고 드라마는 내가 성인이 될 즈음 정말 많이 치고 나왔지만 살면서 프랑스 극장에서 영화 '아가씨'를 보거나 봉준호 감독님이 세계적인 거장이 되거나,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세계적인 화제가 될 거라는 말을 내가 고등학생 때 하고 다녔다면 애국심에 머리가 돌아버린 학생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2017년에 프랑스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내 나라가 얼마나 살기 좋은지 깨닫기 시작했다. 2017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 인생에서 이 기간만큼 '애국자'였던 적이 없다. 하지만 2017년에도 아직은 내 나라의 문화적 역량이 지금만큼 꽃필 거라 진지하게 믿지 않았다. 성격이 원체 좀 비관적인 편이라 그런가 그런 바람을 갖고 살다가는 언젠가 크게 실망하기 딱 좋으니 상처가 될 기대는 품지 말아야 한다는 주의이기도 하고. 언젠가 다양한 형태로 남을, 나보다 오래 사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꿈을 품은 사람치고는 이상하게도 문화국가론에 비관적이었다. '비주류' 시절의 마음가짐이 너무 내면화되어서 그런가? 그래서 한국 문화가 지금만큼 융성한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하기도 하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 구청에서 '김치 페스티벌'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아, 여기가 한국 사람이 많이 사는 동네라서 이런 이벤트도 있구나 라고만 생각했다. 매년 해왔던 모양이지만 아직 가본 적이 없어서 그냥 아파트 단지에서 열리는 장터 같은 풍경을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상상한 풍경 속에 프랑스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평소에 일본을 너무 좋아하는 프랑스 사람들이라서 그런가, 아무리 작은 행정구역에를 가도 일본 관련 소품가게는 꼭 있는 나라라서 그런가. 애초에 그들이 내, 우리 문화에 관심을 가질 거라는 생각을 크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쿨한 척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 치고는 우스울 만큼 구청에 내걸린 3호 태극기의 존재가 너무나 반가웠다. 이게 뭐라고, 그냥 오늘 축제하는 거라 걸어놨을 뿐인데. 한국에 못간지 1년이 되어가서 그런가? 이렇게 반가울 일인가. 나도 내가 웃겼다.
회장에 브레이브걸스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니, 명곡이긴 한데 이 곡을 사람들이 알까? 생각하며 입구에서 보건 패스 검사를 받았다. 그렇게 들어간 회장에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앞줄에 마련된 좌석은 이미 꽉 찼고 사람들은 잡채나 핫도그, 전 같은 먹을거리를 손에 들고 서서 공연을 보고 있었다. 그냥 봐도 한국 사람보다 프랑스 사람이 훨씬 많다. 머리에 딱밤을 한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아아.. 내 '홍대병'은 나은 적이 없었고 사실 '홍대병'이 '비주류 병'으로 변한 거 뿐이었나? 사실 그랬던 건가? 아니 진짜야? 우리 나라 문화 이제 주류문화라고 해도 되는 거야? 나는 주인에게서 '기다려'와 '먹어'를 동시에 들은 개처럼 혼란스러웠다.
내가 하는 SNS는 꽤 제한적이다. 위치정보 때문에 인스타그램 릴스 같은 곳에 프랑스에서 올라온 릴스들이 더 많이 뜨는 걸 빼면 한글 콘텐츠만 보고 있고, 자주 하는 커뮤니티는 네이버 프랑스 거주 한인카페에 맘카페 뿐이다. 그래서 다니엘이 '사람들이 오징어 게임 얘기만 해, 그거 봤어?' 라고 했을 때도 (부끄러움이 반이었고) 퉁명스럽게 '그랬어? 몰랐네' 라고만 했다. 다니엘이 '뭐야, 너 인스타그램에도 오징어 게임 얘기만 뜬다며' 라고 했을 때도 '나는 한글 콘텐츠만 보잖아..'라고 말했다. 비주류 병에 한번 걸리고 나니 조금만 뽐내도 이 현상이 확 사라질까봐 무서운 마음이었다.
그런데 김치 축제 회장에 들어오니 이미 입구부터 사람들이 딱지를 치고 있다. 어안이 벙벙하다. 유명한 한인 마트 부스에는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고, 김치 시식 부스도 마찬가지고. 다양한 김치를 전시해둔 테이블 앞에는 프랑스 학생들이 서서 이것 좀 보라고 친구들을 부르고 있었다.
닥터 후 시즌 5에 반 고흐가 미래로 와서 자기 작품이 얼마나 소중히 다루어지는지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를 보고 오열하는 장면이 있다. 나는 반 고흐를 너무 좋아해서 그 장면이 정말 먹먹했다. 그런데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축제를 즐기는지 보고 나니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농담으로 입에 담는 '보고 계십니까, 김구 선생님'이 자꾸만 생각나는 게 아닌가.
프랑스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프랑스 사람들이 얼마나 일본에 관심이 많은지 봤다. '망가'와 '망가카(일본어로 만화가라는 뜻)'가 이미 프랑스어 명사가 되어버린 만큼 일본이 꽉잡고 있는 문화계 분야들에서 그 힘이 얼마나 큰지를 봤다. 프랑스 유기농 카페 EXKI에 들어갔을 때 메뉴에 Miso가 있는 것을 보고 아 이 사람들은 아시아에 중국과 일본이 아닌 나라가 몇 개나 있는지는 몰라도 Miso는 아는구나 싶어 조금 허탈했던 적도 있다. 그런데 회장에 들어섰을 때 프랑스 사람들이 내가 어렸을 적 했던 놀이를 하고, 엄마랑 하나씩 깨먹으면서 걸었던 달고나를 궁금해하는 모습을 보니 그 기분은 말로 하기 어려울 만큼 뭉클했다.
나는 어릴 적 1년은 국립국악원에서 장구를, 3년은 같은 지역에 살던 선생님께 가야금을 배웠고 성인이 된 후에는 1년동안 일본 전통 악기인 고토를 배운 적이 있다. 종로의 일본 문화원에서 수업을 듣는 동안 옆 교실이 샤미센 반이었다. 프랑스가 워낙 일본과 친밀한 나라이기 때문에 예상을 못한 바는 아니지만 같은 현악기라도 프랑스에서 샤미센 현율은 누가 들어도 '쟈뽀네(일본의)'라고 알아듣는다는 게 좀 야속했었다. 야속한 사람 치고 알리려는 노력을 한 적도 없지만. 이 사람들이 샤미센 현율과 가야금 현율의 차이는 몰라도 가야금이나 해금을 들었을 때 '꼬레앙(한국의)'이라고 알아듣는 날은 올 수 있을까? 답답하기도 했다. 아마 나는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사람이 참 단순하다. 오늘 대금과 가야금, 장구 연주자 세 분의 훌륭한 연주에 쏟아지는 박수 갈채를 보면서 그동안의 갑갑했던 마음이 조금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부끄럼을 많이 타는 게 스스로도 싫다. 아무리 내가 원래 부끄럼을 타는 사람이라지만 내 행동 하나하나가 '동양인은 원래 부끄럼을 많이 타는 애들이다' 라는 선입견에 일조하는 기분이 들어서다. 나는 겸손한 게 좋지만 그 겸손의 틀에 갇혀 내가 자꾸만 내 한계를 공고히 그어 내는 느낌도 든다. 오늘 축제에서 느낀 뭉클함과 자부심에 힘입어 스스로도 내 문화를 많이 알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의 시선을 너무 많이 생각하는 탓에 '쟤 요새 한국 문화 좀 잘나간다고 아주 신났네' 같은 시선을 받을까봐 말을 조심하며 지냈다. 하지만 물 들어올 때 우리 같은 사람들이 집에 있는 도마로라도 노를 저어 줘야 이 배가 더 멀리 갈 수 있지 않겠나. 인생의 반 정도를 '내 것'보다는 '남의 것'을 더 쫓아다닌, 문화의 탕아로 살았다. 그런데 남의 나라에 뿌리 내리고 살아보니 내 것의 존재가 얼마나 든든하고 내 기를 살려주는지 잘 알겠다. 그놈의 '비주류 병' 때문에 나는 어떤 단체에 속해 비영리 활동을 하는 일을 가장 경계하고 고립에서 오는 자유를 더 선호하는 편인데, 당장 한국 문화 단체에 적을 두지는 않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우리 것 알리기는 무엇이 있을지 생각해보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