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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 Sep 06. 2024

7주, 파리, 게임회사(3)

무인도행

결혼할 때도 한결같이 돈이 없었지만 2017년 직장생활을 할 때의 우리는 정말로 돈이 없었다. 그리고 처음 해본 자취와 처음 해본 해외생활로 나는 심신이 조금 망가졌다. 건강하지 않은 마음으로 저금액과 다음 일자리, 이 두 가지에 많이 집착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많이 기대되었지만 1년 동안 일하며 겨우 천만원을 모았다는 사실과 한국에 돌아가면 또 돈을 많이 쓸 거라는 사실, 이대로 이 대륙에서 다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다시 한국에서 기약 없는 직장생활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천만원이라는 금액에 집착한 건 돈을 더 모아야 가족들한테 또 다른 국가에서 1년을 살겠다는 말을 할 때 당위성이 생길 거라는 이유에서였고, 다음 일자리는 남자친구와 너무 멀지 않은 나라에서, 또 비슷한 시간대에서 일하고 싶다는 이유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도 한국에서 일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강했기 때문이다.

겨울휴가로 떠났던 이탈리아, 리오마고레

 결혼 전 짧게 한국에서 일할 때 좋은 동료들을 많이 만나 치유됐지만, 2017년 프랑스에 취직하기 전에 나는 두 번 취직했고 각각의 직장에서 성희롱과 성추행을 한 번씩 당했다. 각각 방송국과 광고대행사였는데, 광고대행사 측에선 내가 문제를 삼자 본부를 옮기는 방향으로 조치했지만 옮긴 본부도 상사 책상에 약이 그득했고 나 역시 얼마 안 있다 건강 문제로 퇴사했다. 광고 대행사에서 가장 무서웠던 순간은 성희롱을 당했을 때 회의를 중단시키고 그런 짓 좀 하지 말라고 말했던 순간이 아니라 옮긴 본부의 상사가 "얘들아 나 갑자기 귀가 안 들려"라고 말하고 응급실에 갔던 날이다. 그 상사는 다음날 출근해서 응급실에서 고쳐줬다면서 와하하 웃었고 상사의 상사도 와하하 못 말린다니깐, 이라고 말하며 웃었는데 그 아침 풍경 자체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옥도나 다름없다. 이런 상태에서 프랑스에서 1년을 보내고 나니 일단


- 1년 게임업계에서 보낸 이력을 살리려면 유관 경력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 또 이전 직장 같은 일이 생기면 진짜로 마음이 뽑혀나가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이 회사에서 보낸 마지막 두 달은 스웨덴, 독일, 아일랜드, 영국에 있는 게임회사와 IT 기업에 올라온 모든 구직공고를 보면서 지원서를 날렸다. 그런 피폐한 상황에 사람들이 자꾸만 휴가 계획을 묻거나 '넌 대단하다, 나는 휴가도 없이 10개월 일해본 적도 없고 그럴 수도 없을 거야'라고 말을 하니 조금 부아가 치밀 때도 있었다. 누군 좋아서 대단한 줄 알아!! 누군 좋아서 집에 가는데 비행기로 11시간이 걸리느냔 말이야!' 늘 마음속으로 꾹 삼키고 말았다. 짧게라도 어딜 다녀오면 조금이라도 쉬었을 텐데 떠날만한 여유가 없었다. 돈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석사 졸업할 당시 논문 주제가 소셜미디어였다. 나는 페이스북에서, 인스타그램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고 그런 테크기업에서 일하는 게 멋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도비, 페이스북, 에어비앤비, (당시) 트위터의 취업공고를 관심 있게 지켜봤다. 팀리더가 페이스북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꼭 이 여자와 친하게 지내 내 미래를 손에 넣겠다는 생각을 했다. 같이 점심을 먹거나 혼자 있는 그녀에게 말을 걸면서 알아낸 건 페이스북에도 내가 지원할 수 있는 일자리가 하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본사에, 지금 직장처럼 다양한 국가 시장을 맡은 담당자가 있고, 팀리더는 친절하게도 그녀가 어떻게 합격할 수 있었는지나 면접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까지 알려줬다. 후광이 비치는 것만 같았다!


 아일랜드, 지금까지 관심을 가져본 나라는 아니지만 프랑스에 올 땐 안 그랬나, 프랑스는 뭐 관심이 있어서 왔나. 산산조각 난 내 경력을 전시하는 이력서를 고칠 방법이 이렇게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페이스북, 이 한 줄이면 그다음 일자리 걱정할 필요도 없다. 일자리를 맡겨놓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생각했다.


 원래도 없던 여유가 점점 더 희박해졌다. 약간 종교적이기까지 한 광기가 나를 휘감았다. 아일랜드가 답이다! 마침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이 더블린 워킹 홀리데이 막바지에 있었다. 생활비는 어느 정도인지, 집세는 어느 정도인지 족집게 과외를 받은 후에는 내 나름대로 이 직업에 대해 조사를 했다. 한국에 있는 동안 만난 이모가 혹시 내가 중병에 걸렸는지 넌지시 묻더라고 엄마가 말했다. 그만큼 살이 급하게 빠져서였는데,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 했다. 살이야 먹으면 돌아오는 것이라고 신경도 잘 안 썼다. 짐작이 가시겠지만 그만큼 심신의 상태가 안 좋았다. 하늘이 내게 응답하는 듯했다. 아일랜드 워킹 홀리데이 추첨에 합격했고, 지원을 원했던 '그 일자리'의 공고가 났다. 스크리닝에 합격했다. 이건 날더러 가라는 거지.


 면접 전 과제가 날아왔다. 무척 긴장했는데 아직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기술적인 질문은 없었다. 또 합격. 면접 일정이 잡혔다. 이건, 이건 된다. 아일랜드가 나를 부른다! 기우제를 지내는 만신처럼 간절했다. 남자친구와는 같이 여름휴가도 못 갔으니 1월이 되면 일본에 가자고 약속을 했었다. 이런이런, 여기 합격하면 우리가 일본에 갈 수 있을까? 정말 많이 들떠있었다. 그동안 변변치 않은 직장에서 일했지만 조국이 알아보지 못한 나를 드디어 세상이 알아본다는, 쥐구멍에 든 볕이 너무 따뜻했다.


 그리고 내가 팀원 면접에 합격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페이스북에 떨어졌다. 더블린과는 멀리, 멀리 떨어진 코크라는 도시에 있는 액티비전에서 지금까지와 같은 게임 번역 감수 일자리를 구했다. 어떻게든 코크에 가서 계속 도전해야지, 시작은 코크에서 하더라도 더블린에 가야지. 액티비전은 시간을 오래 주지 않았다. 24시간 안에 답변을 달라고 했다.


 남자친구와 가족들이 같은 이유로 반대를 했다. 나도 무시를 해왔을 뿐이지 못 느꼈던 부분이 아니었다. 나는 꽤 만신창이였다. 다들 이대로 코크에 보내면 고립감과 나를 망칠 자유로 가득한 생활이 내 몸을 돌이킬 수 없이 해쳐놓을 거라 생각했다. 사실이었다. 결국 액티비전에 갈 수 없다 답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6개월 동안의 우울증 치료를 시작했다. 주사위를 몇 번 굴려야 이 무인도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쥐구멍에 볕 드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생각했는데, 아무도 도와줄 사람 없는 곳에서 진정한 자취를 시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허탈했다. 27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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