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도 탈출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우울증 치료가 6개월 만에 끝났다. 결혼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결혼이야 돈이 없어도 한다지만 프랑스 가는 티켓은 공짜가 아니니 돈을 벌 필요가 있었다. 업무적으로는 아직도 갈피를 못 잡았다. 조각난 경력만 다양한 분야에 포진해 있고, 나이 많은 신입으로라도 대기업에 들어가는 걸 노리고 치열하게 준비해야 하나(이 생각은 프랑스로 간 후로도 계속 쫓아왔다)? 지금이라도 오래 정착할 만한 새 분야를 잡아야 하나? 사실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아일랜드에 안 간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을까 매일 되물었다. 당시까지 내가 거친 직업은
- 방송국 국책과제 연구원-과제 내용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뭐든 시키면 한다는 뜻이다-으로 6개월
- 광고회사 AE로 6개월
- 게임회사 번역감수로 10개월
을 지냈다 보니 치료가 끝나고 한창 면접을 보러 다닐 때도 '그래서 커리어적으로 이루시려는 게 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당시에는 미디어나 증강현실, 콘텐츠 마케팅 키워드랑 조금이라도 상관이 있는 사무직이면 무조건 지원했다. 가장 많이 들은 말은 '근데 다시 마음 바뀌어서 프랑스로 가버리시면 저희는 어쩌나요'였고, 결국 6개월 계약직이라 나에게도 부담이 덜한 글로벌 인프라기업 조직 내 기술상담직을 찾아 안착했다. 사회로 다시 돌아간다는 사실이 조금 무서웠지만 나는 단약 직전까지도 약 부작용을 강하게 경험했던 편이라 치료가 끝나 부작용 때문에 고통받지 않는 것만 해도 기분이 좋아 사회 복귀에 대한 불안은 상쇄되었다. 저 일을 구하기 전까지는 일을 구하고 싶기도 하고, 영영 이대로 살고 싶기도 한 마음으로 데이터를 다루는 단순작업 위주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단순작업은 원래도 좋아했지만 치료기간 동안 더 좋아하게 되었다. 우울증을 겪으면서 두뇌회전이 예전만큼 기민하지 않다고 느꼈는데 단순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나도 여전히 쓸모가 있다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기분상) 쪼그라든 뇌는 정말 천천히 펴지더니 치료가 끝나고 3년 정도 지나자 예전처럼 돌아갔다. 그걸 실감했을 땐 기분이 정말 좋았다.
방송국은 나와 함께 일하는 직급들이 거의 비정규직, 소위 프리랜서 계약들이었는 데다 소위 '성골'이라 부르는 정규직들과 어울릴 일이 많지 않아서 직급으로 차별받은 경험은 없었다. 혹시? 계약직이라 차별받는 건 아닐까, 나름대로 각오를 하고 첫 출근을 했다. 계약은 헤드헌터를 끼고 이루어졌기 때문에 휴가가 한 달에 하루 발생은 하겠지만 아무래도 근무기간이 짧으니 쓸 수 있을지는 고용주 재량에 더 가깝다는 애매한 말을 듣고 출근했다.
아무 기대도 없었다. 프랑스 갈 돈만 벌리면, 나한테 불법적인 짓만 하지 않으면 된다. 그렇게 출근한 곳인데 일을 시작한 뒤 생전 처음으로 '사람이 좋은 직장'이 뭔지 알게 되었다. 상사들은 편견이 없고, 인격적으로 존중할 줄 알았고, 일이 나를 지루하게 한다면 다른 일을 시켜줄 용의도 충분히 가지고 있었으며 꼬여 있는 사람들이 없어 어느 직장에나 있는 앙숙 관계도 없었다. 큰 회사이니 다른 팀은 달랐을 수도 있겠다. 아마 내가 처음 취직한 곳이 이곳이었다면 한국을 떠날 생각을 못 했을지도 모르겠다고 느꼈다. 겨울에 눈이 오면 젊은 사원들이 먼저 부장님에게 같이 눈사람을 만들자고 했다. 그걸 또 부장님은 나가준다. 당시 스마트폰으로 보면서 실시간으로 참가하는 퀴즈쇼가 유행이었는데, 점심을 먹고 나면 다 같이 회의실에 모여 답변하기까지 주어진 짧은 시간 동안 1번인지, 2번인지 3번인지 떠들었던, 여고시절 점심시간 같았던 시간들이 정말 좋았다.
방송국에서 일하며 제일 많이 본 풍경이 프리랜서 계약(3개월마다 연장한다)으로 채용한 사람을 계약 연장해서 쓰다가 쫓아내는 풍경이었다. 일을 잘하는 사람에게 계약직에 당신을 추천하겠다고 희망고문하며 '자발적인' 야근을 장려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부하직원의 절실함을 이용하고 뒤통수를 치거나 앞에서는 형, 내 동생이라 부르던 사람들이 각자 부하직원 앞에서는 서로를 욕하는 모습도 놀랍지 않을 만큼 보았다. 그러다가 이곳에서 처음으로 일단 계약직으로 써보고 채용을 할지 말지 결정하는 게 거짓말이 아닌 기업도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내가 얼마나 이곳에서 바닥난 인류애를 충전할 수 있었는지 조금 짐작이 되실 것 같다.
사랑이 세상을 구한다는 말처럼, 흑화 우울증 직장인이었던 내가 다행히 건강한 사람들을 만나 성공적으로 사회에 복귀했다. 하지만 부서진 이력서를 고쳐보자는 포부와 직업을 통한 인정욕구는 사라지지 않아서, 나는 다시 시작한 프랑스 생활에서 오랜 시간 번민하게 된다. 특히 프랑스어라는 거대한 산을 입구부터 올라야 하는 처지였으니, 갈 길이 아주 멀었다. 프랑스에서의 첫 직장을 너무 거짓말같이 구한 탓에 나와 남편은 그 산이 얼마나 높을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외국계 회사에서는 국내기업과는 다른 연차 체계를 차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기업 같은 경우 같이 근무하는 동료들은 국내기업과 동일한 연차를 받았는데, 기존에 다른 외국계 기업에서 오랜 기간 이직 없이 근속하다가 다니던 회사가 이 회사에 합병되어 연차가 45일 정도 되는 부장님이 한 분 계셨다. 다들 부장님을 연차 만수르라고 불렀다. 다른 팀까지 찾아보면 부장님과 같은 경우가 꽤 있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