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의문
새해에 일을 시작하고 5개월이 지나 휴가철에 접어들었다. 수습기간인 3개월이 무사히 흘러갈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못했었다. 수습 기간이 지나 정식으로 계약서에 사인하러 갔던 날에는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사인을 하고 또 2개월이 지나 하나둘씩 여름휴가를 계획하는 동안 나는 몇 개인가의 의문을 품게 되었다.
- 휴가가 5주부터 시작되면 그 휴가를 보낼 돈은 다들 어디서 나는가?
- 하던 일들은 어떻게들 하는가?
- 1년에 두 번 휴가를 크게 가면 돈은 언제 모으는가?
첫 번째 질문은 너무 사람 나름이라 여기서 평생 산다고 알 수 있을 것 같지 않고-누구는 시아버지의 '성'에 가서 보내고 누구는 쥐라 산맥에서 캠핑을 하는 등 일반화가 불가능할 만큼 다채롭고 각자 생각하는 금액 차이도 크기 때문- 두 번째 질문은 지금까지 다양한 곳에서 일을 해봤지만 다들 어떻게든 해냈다.
앞으로 다른 회사에서는 휴가 내는 풍경이 어땠는지 적겠지만 전화에서 말한 것처럼 이곳에서는 마감이 정말 중요했다. 게임 출시 과정에 주, 조연이 있다면 우리 팀은 중요도가 높지 않은 조연에 속했고, 수정 사항이나 예상치 못한 논쟁요소는 어디에서든 튀어나왔기에 예비의 시간은 필요했다. 하지만 확보된 시간이 우리 팀에게 오는 것은 애초에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휴가를 가기 전 사람들은 2주를 떠나면 그 기간 동안 출시될 분량만큼, 3주를 떠나면 또 그만큼을 미리 감수해 놓고 떠나야 했다.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비교적 많은 팀이었기에 겹치는 언어가 있는 경우에는 한 명이 휴가를 가면 그 언어를 할 줄 아는 다른 한 명이 대신 출시 직전 최종 검토를 해주는 등 최대한 서로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도왔지만 완전히 대신해 줄 수 있는 성격의 업무는 아니어서 한계가 분명했다.
다 같은 기간에 한꺼번에 떠나지 않게 하는 게 리더의 일 중 하나였기 때문에 7-8월에 내가 사무실을 지킨다 말하자 팀 리더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당시엔 뭐든 도움이 된다면야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어차피 여러 명이 떠났다고 한들 남이 대신해 줄 수 있는 부분이 그리 크지 않아서 떠나는 사람 수를 조절하든 아니든 큰 차이는 없었겠으나 뭔가 이유가 있었겠거니 싶다. 상사의 눈치처럼 말이다.
회사에서 하는 일은 다 어떻게든 되게 되어 있다, 라고들 한다. 한국에서는 주로 누군가 사고를 쳤을 때 해주는 말이지만 이곳에서 몇 년 일해 보니 프랑스식 휴가 시스템에도 적용되는 말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주 4일제나 4.5일 제면 모를까 한국 실정에 5주 휴가 도입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고 다들 말하지만 정말 절대 불가능할까. 도입될 날이 요원하다 하더라도 5주나 쉬면 일하는 사람이 없어서 회사가 다 망하고 경제가 다 망할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5주나 쉬면 일은 어쩔 거냐'라는 질문에 한해서는, 정말 최악의 직장에서도 어떻게든 돌아간다는 걸 배웠기 때문에 나는 제법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다. 그게 어떻게든 되긴 되더라고요-몇 주가 어떻게 된다는 뜻이지 1년이, 2년이 어떻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애초부터 사람을 충분히 뽑아야겠지만.
마지막 세 번째 질문, 여름은 이비자, 겨울은 몽펠리에에서 파티를 즐기며 보낸다는 회사 젊은이들을 보며 나는 약간의 공포를 느꼈다. 나야 워낙 (한국 살 적에) 받은 월급이 적어서, 그 와중에 프랑스까지 오려고 아등바등 겨우 빚만 안 내고 돈을 마련한 처지라지만 물가도 비싼 파리에 월세를 내고 살고, 부모와 같이 사는 것도 아닌 사람들이 이비자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테이블을 잡아 클러빙을 즐긴다면 한해 저금은 없는 거나 다름없다. 안 그래도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인데 함부로 물을 수 없는 돈 이야기라 초반엔 거의 묻지 못했지만 어느 순간 궁금증이 두뇌를 지배했다. '나는 집세 내면 남는 돈이 별로 없는데 너희는 어때?' 내가 먼저 물었다.
'우리는 저금한 돈 없는데?'라는 대답이 돌아왔을 때, 역시나!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아무리 나랑 직군이 달라서 월급 차이가 나더라도 1년에 두 번 그렇게 써재끼면 남아날 수가 없지. 말이 된다. 당시 내가 받던 월급이 1800유로남짓, 아직 원천징수가 적용이 안 되던 시절이라 여기에서 10%는 소득세로 저축해둬야 하는 돈이었고 당시 우리가 살던 집이 16제곱미터에 월세는 600유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16 제곱미터면 4.84평이다. 남자친구가 고향에서 파리로 올라와 지내던 소위 '하녀방(근대에 하녀들이 쓰던 방, 화장실과 샤워는 공용이었다고 한다. 방 크기는 본인도 기억을 잘 못하지만 고시텔 방정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에서 탈출해 학부 2학년 때쯤 계약한, 그러니까 오래 산 집에 월세를 올리지 않아 600유로였지 같은 동네 다른 집은 이보다 비싼 상황이었다.
파리에서는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편인 우리 동네의 집세가 그러했고, 직장의 젊은 사람들은 보통 헤퓨블릭처럼 더 떠들썩한 동네를 선호했으며 보통은 우리처럼 16제곱미터 방에 혼자 사는 것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1800-2000유로 정도 버는 사람들이 한 달에 적어도 800유로의 집세를 낸다 가정해야 한다. 세금 낼 돈까지(거주세도 발생하지만 이것은 계산하지 않는다) 제외하면 820-1000유로 정도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거다. 당시 한 달 생활비를 500유로로 제한하려고 해도 저축액이 마음 같지 않았던 기억이 남아있다. 조심을 해도 600유로, 방심하면 700유로로 한 달을 났다. 2017년 당시 점심값이 음료 포함 9-11유로 정도여서 레스토랑 티켓 한 장(회사와 내가 반반 부담해서 받는 식음료 상품권 같은 개념, 회사마다 다르지만 우리 회사는 한 장에 10유로짜리를 줬다)으로 충분히 해결이 되었는데 작년 2023년에 다니던 직장 주변에서 한 끼에 15유로가 보통이었던 걸 생각해 보니 인플레이션이 무섭다.
당시 다녔던 회사는 스타트업이고, 위 문단에서 말을 걸었던 사람들은 회사에서도 갓 졸업해 취직한 사람들이라 이 예시는 꽤 극단적이다. 뭐야, 나만 힘들어? 나만 이렇게 한 달 꾸려가는 데에 애를 먹느냔 말이야.. 살짝 겁을 집어먹었던 나는 그 후로 만난 사람들, 그리고 남자친구의 경험이나 집에 온 남자친구 동기들의 이야기를 통해 조금은 안심했다. 파리로 상경한 젊은이들은 다같이 돈이 없고, 제대로 저축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나 투자로 재산을 불리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는 걸 배워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