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에서의 첫 직장
나는 2016년에 만난 남자친구를 보러 2017년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들고 프랑스에 갔다. 프랑스어는 전혀 못 했고, 준비한 돈은 3개월 정도 버티면 바닥날 정도 금액이었다. 정말 안일하게 '취직하면 좋고, 아니면 집에 가서 생각하지'라는 마음으로 프랑스에 왔는데 아무도 예상치 못하게 덜컥 영어를 쓰는 게임회사에 취직했다. 애초에 프랑스에 학위도 없고, 최종면접 전날에 손가락을 다쳐 조금 부러진 상태로(살짝 부러졌다는 걸 당시에는 몰랐고 몇 년이 지나서 같은 손을 다쳐 엑스레이를 찍은 덕분에 알았다) 생생한 고통을 맛보며 면접을 봤었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은 안 뽑을 거라 생각했는데 마침 크리스마스 기간에 합격 연락을 받아 무척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
아직 프랑스로 가기 전, 지금은 남편이 된 남자친구와 만난 지 얼마 안 된 연인 특유의 맥락 없는 대화를 이어가다가 '프랑스에는 휴가를 못 가는 아이들을 위해 여름휴가를 보내주는 자선 프로그램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게 정말 충격이었던 기억이 있다. 여름에 3주, 겨울에 또 2-3주를 떠나는 나라이니 아무 데도 안 가는 아이들이 느끼는 박탈감은 내가 겪거나 상상 가능한 범위 그 이상일 텐데, 당시에는 그 애들한테 더 필요한 게 있지 않을까? 학비나 생계 같은 부분을 먼저 도와주는 게 맞지 않을까?라고 혼자 생각했었다. 휴가 0일의 사고방식이 많이 빠져나간 지금도 무엇이 더 필요한 도움인지는 모르겠다. 둘 다 삶의 중요한 부분이니.
이 회사에 언제부터 출근할 수 있는지 물었을 때, 나는 '당장'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당장 그 사무실로 쫓아가 서류에 사인부터 하고 싶었다. 나는 내 절실함이 이용당하기 쉽다는 걸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고, 처음 같이 맞는 크리스마스를 프라하에서 보내기로 약속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당장 다음 주부터 출근했을 것이다. 당장 사인부터 해서 내 취업을 기정사실로 만들고 싶은 열망을 애써 무시한 채 연말을 보냈다. 인사부 사람이 내게 한 달에 2.08일의 휴가가 발생하고 이와 별도로 1일의 RTT(Réduction du temps de travail)라는 무언가가 발생한다고 설명해 주었는데 나는 이것이 RTT가 병가 같은 개념이라고 멋대로 오해를 했다. 애초에 휴가 0일의 삶에 너무 익숙해서 사실상 한 달에 3.08일이 발생한다고 이해하면 된다는 결론으로 전혀 나아가질 못했다. 한 달에 하루 발생하는 것도 고용주 재량에 의지해야 했던 시기가 있어서다.
지나고 보니 RTT는 법정 근무시간(35시간)을 초과한 분량을 휴가로 보상하는 개념이라고 보면 되는데 당시에는 남자친구도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상태에 나와는 다른 계약 조건으로 근무를 했기에 그도 똑바로 설명하진 못했다. 남자친구는 'RTT는.. 그냥 RTT야.'라고 하나마나한 설명을 했었다. 나는 프랑스어를 못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와 비교도 안 되는 조건에서 근무한다는 기쁨이 너무 커서 스스로 조사해보지 않았다. 그리고 이 직장을 떠난 후 나는 6년 동안 RTT를 주는 직장을 만나지 못했다. 초과근무를 아예 안 한 곳도 있지만, 일상적으로 야근을 하는 곳에서도 RTT를 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 직장을 다닐 무렵 썼던 글에 나는 5주라는 휴가를 받아 너무 감격했었는데, 마지막 받은 급여가 뭐 때문에 그렇게 후했는지 전혀 이해를 못 했다. 평소 월급의 두 배를 좀 넘는 금액이었다. 나는 10개월 근무를 했고 회사를 그만두기 전에 3주 휴가를 냈으니 (2.08*10)-15= 5.80인데 휴가 5일을 덜 썼으니 계산해 준 추가 임금이라 보기엔 평소 급여와 차액이 너무 컸는데 외국인치고 복잡한 서류를 똑바로 안 읽는 정말 위험한 버릇(지금은 고쳤다)이 있었던 나는 깊이 생각을 안 하고 그 일을 넘겨버렸던 것이다. RTT가 뭔지 몰라서 쓰지 않은 분량까지 임금으로 쳐서 준 것이었는데. 결국 6년이 지나서야 내가 당시 받고 있던 휴가는 7주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곳에 다니는 동안 동료들과 나는 서로를 신기해했다. 나는 별로 급하거나 중요해 보이지 않는 일에 턱턱 반차도 내고 뭣하면 하루를 통째로 쉬는 동료들이 신기했고, 동료들은 한국 갈 때 모아서 써야 하니까 하루도 허투루 쓸 수 없다는 생각으로 다리를 다친 후에도 회사에 나오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병가 내는 과정이 얼마나 간단한지 내가 잘 몰랐던 탓도 있지만 설령 알았다 한들 병가도 병결도 가벼운 마음으로는 쓰지 못했던 평생 버릇이 하루아침에 가시는 건 아니니 변하는 건 없었을 것 같다. 우리 번역감수팀이 손을 대는 단계는 출시 직전 단계이고, 마감이 중요한 일이었다. 입사 초반, 뭔가 증명해 내야 한다는 생각에 생일 파티 등으로 일과 시간 중 두세 시간만 날아가도 조금 예민해진 시기였다.
나 자신도 그런 시각에서 자유로웠다고 말하기는 힘들기에 말하기가 부끄럽다. 아시아권에서 온 동료들이 느끼는 어떤 프로의식에 대한 우월감이 우리 사이에도 존재했다. 이 팀은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 언어로 일을 하는 팀이었기 때문에 어지간히 프랑스 생활을 오래 한 동료가 아니고서야 자연스럽게, 본인의 출신국 국민으로 느끼는 정체성이 훨씬 더 강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가까운 나라 출신끼리 모여 밥을 먹을 때, 누구 또 피곤해서 연차 썼다더라~ 하는 식의 말이 오갈 때 나는 보았다. 찰나였지만 분명히 스쳐 지나간 자기만족적인 웃음. 짜아식, 별 것도 아닌 걸로 연차를 쓰더라. 이 온실 속 직장인들 같으니라고. 그 능글맞은 곡선은 언제 얼굴에 드러났나 싶게 사라졌지만 말이다. 그녀도 더 보태 말하지 않았고, 듣던 사람들도 굳이 붙들고 늘어지지 않았다. 짜아식들, 긴장과 동경 속에서 보낸 초반의 몇 개월 동안 이 날의 대화가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동안 해온 생활이 남을 무시할 거리는 아니지만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니 기죽지 말자고, 아직 긴장이 가시지 않은 날들 속에서 그 생각을 붙들고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