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급휴가
그래서 여름은 어떻게 되려나, 생각하며 몇 개월을 보냈다. 여름이 오자 매일 얼굴을 뵙는 청소 이모님이 내 휴가 일정을 묻기 시작했다. 아, 여름이 왔구나. 마치 매미 울음소리가 처음 들린 날의 출근길처럼 나는 여름이 왔음을 실감했다. 전혀 짐작이 가는 바가 없어 헤드헌터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나한테 휴가가 있니? 웃긴 질문이라 생각하면서. 헤드헌터는 바로 답변을 보내왔다. '너는 유급휴가가 따로 발생하지 않는 앙떼림 계약이야. 정 원하면 Sans Solde로 휴가를 갈 수는 있겠지만 네 상사한테 물어봐야 할 안건이야.'
B2 자격증을 딴다고 공부를 했지만 이렇게 직장 용어가 나올 때마다 나는 머리가 멍해졌다. Sans Solde가 대체 뭐란 말이냐. 나보다 먼저 일하던 선임 서류보조한테 물어보니 그가 '원하면 무급으로 떠날 수 있다는 뜻'이라고 알려줬다. 충실한 일꾼답게 그는 우리 같은 서류보조들이 Sans Solde로라도 떠날 수 있는 건 이곳이 좋은 일터라는 증거라면서, 한국 건설회사 사람이 주변에 전혀 없는 상황에도 내게 이 회사의 우수함을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게는 상사가 세 명 있었다. 먼저 1에게 묻고 2에게 물은 뒤 3에게 결재를 받으면 되는 것이었는데 1번 상사가 '맘대로, 원하시는 만큼 다녀오세요'라고 했을 때 나는 한국에서의 안 좋았던 추억 몇 개를 떠올리며 '혹시 가서 돌아오지 말라는 뜻인가, 이딴 걸 묻지 말고 열심히 일하라는 건가'라고 1초 정도 생각했다. 과연 나의 망상이었고, 내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1번 상사가 충분히 막아줄 수 있으니 원하는 만큼 자리를 비워도 된다는, 그의 입장에서는 최대한 따뜻하게 건넨 경상도남자의 진심이었다. 다행이다.
1번 상사가 그리 말해주었어도 그의 일이 이미 많았기에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는 건 너무 미안해서 5일만 포르투갈로 휴가를 다녀오기로 했다. 청소 이모님은 좋은 소식이라고 반색하시면서도 1주밖에 못 쓰는 내가 불쌍하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아직 한국 물이 한참 덜 빠졌기 때문에 5일만이라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청소 이모님은 딸들을 데리고 고향인 모로코에 3주를 다녀오신다고 했다. 이것은 부러웠다. 나도 가족을 보고 싶었지만 계약이 10개월이니 이렇게 단기간으로 일하던 시절에는 다음 일자리를 찾기 전까지 한두 달 정도 한국에 다녀왔기 때문에 겨울에 다녀오면 된다는 생각으로 일했다.
선임 서류보조는 형의 가족들을 보러 미국에 갈 거라 했다. 주재원들도 하나둘씩 가족들 선물을 사서 한국으로 떠난 뒤 밝아진 얼굴로 돌아왔다. 낯익은 브랜드의 차 상자를 선물로 받은 나는 생각보다 이 차 상자가 한국을 그리워하게 만든다는 생각을 했다. 일은 꽤 반복적이었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비유하자면 매일 12개의 장소로부터 도착하는 12개의 박스 속 서류를 열어 올바르게 쓰였는지 검토한 후 그것들이 있어야 할 곳에 올려두는 일이었는데, 이 일과 과거의 경험으로 나는 내가 '반복 작업'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직장을 거치고 나서는 '어떤' 반복 작업인지도 중요하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이 시기로부터 한참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지만.
주로 점심을 먹을 때 이곳이 남초 회사임을 어느 때보다도 강력히 실감했다. 같이 식사하는 분들은 식사를 10분 안에 마치고 바로 오침에 드는 것을 선호했다. 나도 말을 하지 않고 먹으면 꽤 빨리 식사를 하는 편이라 생각하며 살았는데 이들과 함께하다 보면 조금 뒤처졌다. 숙련된 움직임으로 식사 뒤처리까지 한 후 의자를 두 개 붙여 다리를 편 채 잠을 청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가끔 감동했다. 다들 위가 튼튼하신가 봐,라고 생각했다-내가 오래 위염을 앓았기 때문이다-.
한 층만 더 내려가도 프랑스회사였지만 우리 층은 한국식으로 생활했다. 프랑스에서의 첫 회사가 스타트업이어서 한국에서 했던 버릇대로 회사에 오면 슬리퍼로 갈아 신은 후 생활해도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곳에서도 내 마음대로 슬리퍼를 신고 생활할 수 있어서 참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 프랑스 회사 임원이 한번 우리 층에 내려왔을 때 나를 보고 경멸 이외의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표정을 짓기에 나도 비슷한 표정을 지어주고 자리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프랑스에서 조금이라도 진지한 회사에서는 슬리퍼 차림으로 돌아다녀선 안된다는 사실을 의식할 기회가 없었다. 다행히 임원은 문제 삼지 않았고, 나는 남은 개월도 무사히 채웠다. 그가 등에 묶은 강렬한 빨간색 캐시미어 카디건을 추억하며 나 혼자 모드(Mode: 패션, 유행) 할아범이라고 불렀었는데 내 태도를 문제 삼지 않은 것은 고맙다.
지금은 비서로 근무하기 때문에 매일, 출근할 때 신은 신발만으로 생활하고 있다. 모든 책상 밑에 한국산 지압 슬리퍼, 그리고 내가 부모님한테 보내달라고 한 핑크색 생일케이크 슬리퍼가 굴러다니던 이 시절 사무실 풍경이 매우 그립다. 나의 슬리퍼 시대는 이 직장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