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내일
내가 뭘 하자고 이렇게 매일 구직을 하지? 매일 지원서 비를 내리던 비자센터 B 시절, 대부분의 날들은 너무 피곤해서 기계적으로 지원서를 날릴 뿐이었지만 가끔 덜 피곤한 날이 있어 이런 생각이 무의식을 비집고 나왔다. 그때는 보통 '나한테 거짓말 안 치고, 안정적인 회사에서 일하고 싶으니까 그렇지'나 '화장실 가고 싶을 때 그냥 가면 되는 회사 들어가야 될 거 아냐.' 따위의 생각을 했지만 다 지나고 보니 저 말들도 맞지만 나는 내년이 올해보다 더 낫고 다음 달이 이번달보다는 더 나을 거라고 믿을 수 있는 곳에서 일하고 싶었던 거였다. 올해는 내가 이런 일들을 못하지만 내년에는 배울 시간을 낼 수 있을 거라거나,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하다 보면 이런 면들이 더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거나. 인간 생활의 기본 요건이 채워지는 직장을 넘어서 그곳에 있다 보면 내가 더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회사는 꿀이었냐고? 그렇다. 내가 합류한 날은 마침 새로운 식음료 서비스 공급업체와 함께하는 첫날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1주가 지나도 2주가 지나도, 2달이 지났는데도 이 업체가 내놓는 커피며 식사가 얼마나 단가 대비 형편없-는 건 사실이다-는지에 관한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닌가. 게다가 회사에 고령자가 정말 많았다. 사람들이 자신을 소개할 때 들리는 근속연수도 상당히 길었고 말이다. '그러니까 근속연수 평균 10년인 사람들의 최고 불행이 올해 바뀐 이 업체의 만행인 건가..?' 진한 꿀의 향기가 바람에 실려왔다. 게다가 직업 리뷰사이트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은 사실이었다. 사람들이 정말 순했다. 불쾌한 일이 전혀 없었다는 건 아니지만 다른 곳에 비해 강도도 빈도도 현저히 낮았다. 순한 사람들 사이에 있다 보니 언제나 싸울 준비가 되어있던 나도 점점 순화되었다.
내가 모시는 임원은 생각보다 내 이력서의 많은 부분을 기억했다. 어디에 산다고 말했던 부분이나 내가 옮겨 다녔던 회사들, 전공분야 같은 걸 정확히 기억하고 계시길래 역시 임원자리는 그냥 올라갈 수 있는 게 아니군, 이라면서 실례되는 생각을 했다. 수습기간인 2개월을 넘겨 내가 정규직으로 자리를 잡은 날, 그분이 '안 떠나고 우리랑 있는 거지?'라고 하셨다. '제가 일했던 굴라그를 보신다면 절대 그런 불안감은 안 가지실 텐데요', 또 실례되는 생각을 하며 활짝 웃어드렸다. 비서직은 처음 해봐서 조금 걱정도 했는데 앞에서 말한 임원분이 남의 시중 받는 걸 싫어하는 분이라 임원비서보다는 거의 팀비서로 지내고 있다. 험한 꼴을 몇 번 봐온 나는 비서.. 라면 모시던 임원이 날아갔을 때 같이 순장당하는 보직 맞지?라고 생각하여 처음에 지원하기를 (조금) 저어했지만 거의 편집증적인 걱정이었음을 이제는 알겠다.
일주일에 두 번 재택근무가 허용되고 하루에 두 번 티타임을 가진다. 회사에서 열어주는 운동 수업에 1년 100유로 정도로 참여할 수 있고, 다른 체육 활동도 회사에서 지원한다. 업무량은 많을 때야 많지만 30분 정도 더 손을 보면 정리되는 수준이고, 원하는 경우 외국어 수업도 일과 중에 받을 수 있다. 밥이 맛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파리 시내에서 일하던 시절 한 끼 밥값이 15유로였으니 회사에서 같이 부담을 해주는 지금 자기 부담금이 더 적어 삶의 질은 더 나아졌다. 기본적인 생활 편의 부분도 다른 곳과 비교할 수 없지만 동료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 하루종일 사람과 나누는 말이 '안녕', '맛있게 먹어' 뿐이었던 공장 시절에 비하면 외로울 틈도 없다. 특히 공장 시절은 아무리 4.5일제여도 금요일에 덜 일하는 부분을 다른 날 더 일해서 채웠기 때문에 근로시간도 길고 통근시간도 매우 길어 집에 오면 완전히 녹초가 되었던 데에 반해 지금 생활은 너무 부담되지 않게 필요하면 병원도 가고 생활 속에 운동도 끼워 넣을 수 있어서 만족도가 크다.
프랑스에 돌아온 후로 계속, 속도를 최대로 틀어놓은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기분이었다. 넘어지면 크게 다칠 것이고, 오래 달릴 수 없음은 자명했다. 결국 완전히 멈춘 다음에 내려와 다른 러닝머신 위로 가는 수밖에 없는. 늘 불안했다. 매일 용쓰는 생활을 버텨내느라 고장 나서 멈춰 서고, 또 비슷한 생활 속에서 고장이 나서 멈춰 서고, 그렇게 평생을 사는 건가? 생각하면 바람 부는 날 등대 위에 선 것처럼 앞날이 까마득했다. 그렇게 전속력으로 달리다 멈추는 것만 반복하면 결국 은퇴할 나이에는 어디에 가 있는 거야? 어디에 도착하기는 하는 거야?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뾰족한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내가 질 수 있을 만큼의 짐을 지고, 내 세상을 가지고, 어느 날 갑자기 내 세상에서 남편이나 프랑스가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해도 모든 게 끝나지 않을 것 아는 것. 원했던 것은 모두 이루어졌다. 이제 5번째 언어를 배우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은 생활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싶으면 내일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 없이 새 그림을 그린다. 올해는 자유형과 배영밖에 못 하지만 내년엔 평영도 접영도 할 수 있게 될까? 기대하는 힘이 붙었다. 이런 걸 원해서 내가 매일을 아등바등했었구나, 새삼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자센터에 다니는 동안 어떤 근무환경일지 궁금했던 미국 대사관은 비자센터 B에서 수도 없이 러브콜을 날리는 내게 대답도 없더니 수습기간이 끝난 지 몇 달 후 헤드헌터를 통해 연락을 해왔다. 미국대사관 공고의 매력이라면 높은 급여, 아마도 내가 다녔던 A, B센터보다는 덜 경험할 민원인의 거들먹거림, 한번은 다녀보고 싶었던 남의 나라 대사관 근무에 대한 호기심 정도 아닐까, 하지만 이곳 또한 갱신 가능한 계약직을 조건으로 채용했다. 아깝다, 여기까지 다녀보면 3 센터 달성인데! 실없는 생각을 조금 했다. 그리고 나니 마음속에는 호기심만 조금 남아있었다. 그것이 기뻤다. 지금의 행복함을 확인할 수 있어서. 더 이상 뱃속이 시리지 않아서.
길었던 여정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너무 힘내지 않고 잘 살아내고 싶다는 내 꿈은 당분간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