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한 번째

이젠 너와 놀지 않는 게 좋겠어

by 체리

문득 손끝에 차인 생각을 더듬다 그 끝에서 내 우울증의 뿌리 비슷한 것을 찾은 후부터 바로 어제, 선생님에게 '사실 훨씬 더 전부터 죽고 싶었던 모양이다'라고 말하기까지 4년 좀 넘는 시간이 걸렸다. 인정하기가 싫었던 것 같다.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부분만 보면 내 우울증은 작년 중순 즈음부터 시작되어 작년 말 병원에 가기까지 6개월 정도만 방치되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겠지만, 사실 그 훨씬 전부터 무시해서는 안될 정도의 충동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본인의 일에 대해 '같다'라는 애매한 표현을 사용하는 게 싫다고 생각하는 축이지만 이 문제에 관해서만은 '같다'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 사람은 끊임없이 기억을 덧칠하는 존재고, 이 시점에 자신 있게 '그래 나는 죽고 싶었던 것이다!'라고 단정할 수 있을 만큼의 단서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노력하면서 기억을 되짚을 뿐이다.


이전 포스팅에서 나는 잘못된 게 뻔한 선택들을 하면서 그 선택들이 내가 그저 우연히 불행한 결과를 맞은 것처럼 보이도록 마지막 현장을 꾸며줄 거라 기대했다는 얘기를 했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할 때마다 내 단죄자가 되어줄 거라 기대한 사람들은 모두 선한 사람이거나 도덕의 기준이 어중간한 보통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런 바보 같았던 시도들이 -관점에 따라-실패로 끝날 때마다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허탈함과 실망감의 비중도 상당했다. 지금에야 '그때 그런 멍청한 짓을 한 게 죽고 싶어서였다니 소름이군'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당시 나는 내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이런 행동의 기저에 뭐가 있는지 별로 알고 싶지 않았고, '우울해서 타인의 손을 빌려 세상을 뜨고 싶은 나' 보다는 '모험이 좋아서 판단력이 살짝 증발한 나'가 더 멋져 보였기 때문에 별로 진짜 나를 위로하거나 돌봐주고 싶지 않았다.

이 얘기를 굳이 의사 선생님한테 해야 하나 생각하면서 몇 주를 보냈다. 이제 와서 말해봤자 의미도 없는 것 같고 이런 말을 해버리면 지난 4-5년 정도의 시간 동안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도 분명히 많이 있었는데, 우울함이 지난 4-5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이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동안 나 자신마저 그렇게 생각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런데 어제 말을 하고 보니 적어도 나 자신이 지난 시간을 우울하게만 추억하는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그건 다행이다. '죽고 싶은 나'는 가끔 위험과 경솔함 사이 어딘가에 있는 선택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그 제안을 거부할 시간이며 의지가 충분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쿄의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 어떤 남자가 말을 걸었었다. 아버지 뻘이었는데 한국에선 잘 입지 않는 기하학 프린트의 옷에 화려한 형광끼가 섞인 파란색 얇은 패딩을 입고 건축가나 디자이너가 쓸 것 같은 두꺼운 뿔테 안경-일본에서는 잘 쓰지 않는-을 쓴 사람이었다. 그는 나에게 단 미츠를 닮았다고 했고, 이 말만 들어도 이 사람이 내게 순수한 호의-처음 만난 사람한테 섹시파 연예인이랑 닮았다는 말은 안 하니까, 그리고 안 닮았고-로 접근한 건 명백히 아니었지만 나는 가끔 이런 이상한 사람이 뭔 생각을 하는지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길을 건너서 빵집 유리 너머로 보이는 까눌레를 사 먹어볼 생각이었는데, 남자가 말하는 대로 한번 가보기로 했다. 비실비실해 보이는걸, 내 카메라 모서리로 눈을 갈긴 다음에 도망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도망칠 틈은 만들 수 있겠지. 이런 계산도 있었다. 결과만 말하면 별 일 없었고, 남자는 자기가 에돗코-대대로 도쿄에서 살아온 사람-라느니, 가구점을 찾는다느니 말하면서 나와 함께 소품점이나 앤티크 가구점을 둘러보다가 나한테 밥을 한 끼 샀을 뿐이다. 그 남자는 내 앞에서 커피를 마셨었다. 그날 저녁에 만난 사진 동호회 사람이 어이없다는 듯 내게 '그건 아니지' 충고했던 기억이 난다. '별 일 없었는걸'이라고 생각하면서 넘겼다. 그저, 그 남자가 수상해 보이는 가게 앞에서 농담이랍시고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말을 하면서 히쭉 웃었던 게 기분 나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 바보 같은 결정들을 했던 게 죽고 싶어서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 집안은 장성하다 못해 불혹을 넘긴 딸을 독립시키면서도 아쉬워하는 게 자연스러운 분위기인데, 그렇다 보니 반년에 한번 새벽 2시에만 귀가해도 쥐 잡듯 잡히며 아침을 먹어야 하는 곳이고, 그걸 아는 사람들은 내가 잘 '보호'받으면서 살아온 여성이라고 생각했었다. 누가 내 등짝에 특뿔 한우 인증마크 같은 걸 찍어놓은 기분이 들었다. 숨 막혔다. 가족을 사랑하고 집에 있는 것도 정말 좋아하지만, 나는 늘 혼자서 여행을 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도시에서 혼자 인적 드문 길을 걸으면 어깨가 가볍고 괴로움의 원인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그래서인가 '죽고 싶은 나'와 이런 안전하지 않은 결정에 대해 설전을 벌이다 보면 '내가 지금 이걸 하지 않으면 난 겁쟁이가 되는 거야'라는 치기 어린 생각이 많이 들었다.


'죽고 싶은 나'는 내게 어느 정도의 스릴도 느끼게 해 주었고, 그런 안전하지 못한 결정을 여러 번 내려도 내게는 싱거우리만치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아서 웃기다는 생각도 들었다. 허탈감이 들었으며, 이런 거 말고 '진짜' 모험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조금 들었다. 어느 날은 내가 이런 짓을 했다는 걸 ㅇㅇ이가-친한 친구- 알면 미친년이라고 하겠지, 생각하면서 킥킥 웃다가 사무치게 외로운 기분을 씹었다.


4월쯤엔가 애인의 친한 친구랑 밥을 먹다가 애인은 잘 해주지 않는 그의 대학시절 얘기를 들었다. 내 애인은 가라오케에서 노래하는 건 커녕 주목받는 것 자체를 질색하는 탓에 애인이 노래하는 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가 22살 때 잔뜩 취해서 가라오케에서-우리나라처럼 개별 방이 있는 게 아니라 탁 트인 바에서 사람들이 다 보는 가운데 노래해야 하는-셀리나 고메즈의 노래를 불렀다는 거 아닌가. 그날 밤 "나도 듣고 싶어!!"라고 하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시간을 돌리면 들을 수 있을 거야."라고 했다. 나는 계속 조르면서 왜 안돼느냐고 물었고, 애인은 "우린 더 이상 22살이 아니고, 나는 이제 그렇게 폭음하지 않으니까."라고 대답했다. 좀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죽고 싶은 나'가 지금 내 머릿속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면서 지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못 만난 지 좀 되었기 때문이다. 애인에게 들은 것과 비슷한 말을 '죽고 싶은 나'에게 고대로 돌려줘야겠다.


나는 이제 매일 술을 마시면서 뻑하면 우는 22살이 아니고, 위험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게 나를 겁쟁이로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 정 스릴을 느끼고 싶다면 다른 괜찮은 방법도 있을 거야. 그러니까 이젠 너랑 놀지 않는 게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