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네 번째

생의 역설

by 체리

아픈 이야기를 하기 전에 행복했던 이야기부터.

오늘 아침..이라고 해봤자 2시간 전의 이야기지만 최근으로서는 드물게 11시간을 잘 수 있었다. 또 놀랍게도 눈을 떴을 때, 아침 댓바람부터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몸을 위해 하는 일이지만 아침 일찍부터 병원 순례를 하지 않아도 되고, 너무 더워서 땀에 절은 다리가 장판에 쩍 들러붙은 모습을 어질한 머리로 지켜보지 않아도 된다. 이젠 요를 깔아도 더워서 참을 수 없을 지경까지는 아니고, 따라서 푹신푹신한 요 위에서 이불을 덮고 11시간을 잔 다음 부드러운 바람을 맞으면서 깨어나는 아침은 생각보다 훨씬 큰 행복감을 주었다. 시간에 쫓기지 않는 아침이었으며, 솔직하고 진지하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아침이라 더욱 그러했다.


행복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얼마 전에 말벌의 일종으로 보이는 벌이 현관 앞 계단에 집을 지었다. 나는 거의 모든 종류의 벌레를 무서워하는데 말벌이 집을 짓는다는 건 또 다른 차원의 상황이었다. 집은 아직 완성이 되지 않아 어른 주먹보다 조금 작은 상태였고, 결국 벌이 집을 비운 사이 아버지가 장우산 끝으로 찍어 벌집을 부수었다. 벌집에서는 회색 갯지렁이 같은 벌레들이 잔뜩 나왔는데. 벌의 애벌레는 보통 흰색이기 때문에 한참 회색 애벌레의 정체를 검색했으나 허사였다. 아버지는 애벌레들을 빗자루로 모아 화단에 버렸고, 나는 계단에 남아있는 벌집 세 개의 흔적을 보며 벌의 부지런함에 감탄했다. 그래도 또 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근 몇 년은 계속 손톱을 깎을 때마다 '아, 또 쓸데없이 살아 시간을 허비했다'는 생각을 했었다. 손톱만 그런가, 살아있는 한 털이며 손톱은 계속 자라났다. 애인을 만난 후부터 잠시간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우울증이 심해지면서 그 생각들은 다시 찾아왔다. 이 생각과는 별개로 나는 스스로 손톱을 깎을 수 있게 된 순간부터 손톱의 흰 부분을 남겨두려 하지 않았으므로 손톱도 잔털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만큼 깔끔하게 깎아 모은 종이를 뭉쳐 버렸지만 때가 되면 다시 찾아올 생각임을 알았다. 이 생각들은 내가 건강할 때는 밥을 먹고 나면 사라지는 허기처럼 행복을 느낄 때마다 허망하게 스러지는 상념이었지만 우울증이 심해지자 그 상념의 무게도 조금 버겁게 느껴졌다. 내게 손톱을 깎는다는 것은 눈치채지 못하는 시간 동안 눈처럼 쌓인 답답함을 벗어낸다는 의미여서 즐거워야 마땅할 일인데도 자꾸만 '또 3주를 살아있었구나.', '쓸데없는 시간을 살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착잡한 일이었다. 그래도 전자제품 서비스 기간을 연장하듯 또깍또깍 손톱을 깎았다.


내가 죽고 싶든 죽고 싶지 않든 시간은 흘러갔다. 시간에는 귀가 없으니까. 아니면 내 말을 들을 귀가 없거나. 불평하는 건 아니다. 훌쩍 긴 머리칼, 흰 부분이 많아진 손톱, 각질이 자란 엄지발가락이나 아문 상처 같은 것은 늘 지나간 시간을 상기시키고, 그 뒤를 허망감이 와 채웠다. 안 채우느니만 못한 자리였다. 한창 우울증이 심할 때 쉰을 넘긴 부모님을 보며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있을 수 있지?'라는 부러움 섞인 궁금증을 품었는데, 요즘은 두 분을 보면 어른들은 손톱 깎을 때 어떤 생각을 할까?라고 생각한다. 이젠 나도 어른인데, 그 문장의 오류는 신경 쓰지도 않는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한 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 며칠 전부터 다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약 먹는 걸 잊을 만큼 멍해지기도 했다. 통제가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오지도 않던 증상이 왜 또 생겼을까 싶어 거슬렸다. 배가 아프다는 걸 느끼면서도 생리가 원인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현대문명의 결정체인 생리기간 앱이 내게 생리가 오려면 6일이나 남았다고 하지 않던가! 물론 내 몸은 제멋대로라서 매번 틀리지만. 결과적으로 우울한 감정은 생리 때문이 맞았다. 그래도 이유 없는 현상이 아니어서 많이 안심했다. 이유가 있는 엿같은 상황이란 생각만큼 나쁜 것은 아니다. 이유가 없는 것보다는.


나는 생리에 크게 영향을 받는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육체적으로는 꽤 고통을 받은 축이어서 생리 결석 제도가 생긴 후로-아마 내가 중학생 정도일 때 생긴 것 같다- 가끔 이용했지만 그렇다고 감정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는 편은 아니었다. 생리가 내 감정에 주는 영향은 엄청난 짜증이 전부였고, 그건 며칠 동안 축축한 패드를 깔고 앉아 진통제 없이 정상 생활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느낄 짜증이었기 때문에 별로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재작년부터는 갑자기 울컥하는 감정 때문에 화장실로 달려가 우는 정도로 발전하고, 프랑스에 간 후로는 잠시 맡고 있던 아는 사람의 고양이 앞에서 엉엉 울 정도로-고양이는 질색하는 표정으로 화장실 창문에 올라가 나를 피했고 나는 민망함에 곧 울음을 그쳤다- 심해졌다. 생리와 우울증이 공명해서 내게 더 큰 고통을 안겨준 게 아닐까!


생리는 내가 건강하다는 증거인 주제에 내게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의 통증을 안겨주고, 우울증은 죽은 사람의 눈으로 생을 바라보게 했다. 누구든 삶과 죽음 시스템을 만든 존재가 있다면 그이는 이 시스템이 역설 없이는 원활히 작동할 수 없다고 생각한 걸까? 나는 아주 쉽고 바보같이 행복하기만 한 길을 가고 싶은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