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 번째

말이 내려와 쌓였다

by 체리

원래도 건강한 편은 아니지만 내 입으로 뱉는 말 하나의 무게마저 버겁게 느껴졌을 땐 이미 우울증이 깊어진 후였다. 특히 나에 관한 말들은 더욱 무겁게만 느껴져서, 일상적으로 내 감정을 전하는 문장의 앞머리인 '나는'을 입 밖으로 내놓을 때면 이 말들이 왕소금만 한 눈송이가 되어 머리 위에 쌓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그 말들은 더 두껍게 쌓였고, 끝내는 목이 꺾일 지경이 되어서야 무사히 대화가 끝났다. 일단은 대화를 마칠 때까지 우울증을 앓는다는 걸 들키지 않아서 기뻤고, 작별 인사를 하고 뒤돌아 서는 순간까지 혹시라도 말의 무게로 인한 피로감을 내비치지는 않았을지 걱정했다. 그 지경이 되고 나서야 느낀 거지만 세상에 '나는'이라는 서두로 시작하는 문장은 굉장히 많았다. 어제는 뭘 먹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곳까지 오는 길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런 것을 나누는 상황도 아주 일상적인 것이었으므로, 피해 가기 힘든 말이었다.

자괴감은 아주 당연하게 따라오는 것이었다. '나는'? 그까짓 두 음절이 뭐라고. 왜, 나는. 그 짧은 순간의 대화마저 견뎌내지 못하는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 나를 모는 사람은 없는데 아주 좁은 틈새까지 몰려 쫓기는 기분이 들었다. 아주 작은 것들에 집중을 했다. 어쩔 때는 나를 구하기 위함이었고, 또 어쩔 때는 나를 해하기 위함이었다. 나를 구하기 위한 작은 것들이란 때로 심장이 세차게 뛰고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온몸에 힘이 빠질 때. 나의 아주 작은 행동들에 집중하며 그 순간을 무사히 넘기는 행동이었다. 걸음을 떼기 위해 발꿈치에 힘을 주고, 천천히 발가락을 내려 땅에 붙이고, 또 발끝으로 땅을 박차기 위해 힘을 주는 그런 초 단위의 행동에 집중하거나 매 걸음에 숫자를 붙여서 세는 행동. 그리고 나를 해하기 위해 집중했던 작은 것들은, 위에서 설명한 '나는' 같은, 말꼬리 잡기였다. 예를 들면 나는-앗, 또 '나는'이라고 말문을 열었구나- 문장의 끝을 '~한 것 같다'라고 맺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기 마음 정도는 시원하게 설명하는 게 자신에 대한 책임 중 하나라고 생각해서였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기만족이고, 타인을 보면서 이런 생각은 잘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에게 매질할 거리를 하나 더 찾아낸 것뿐이다. 안 그래도 단어를 다루는 일을 즐겨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스스로의 언어생활에 지정한 금지어가 하나씩 늘어가면서 일상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조금씩 커져 갔다. 말 정도는 편하게 했어도 좋으련만, 말이나 표정 같은 작은 단서에서부터 내 우울증의 근본에까지 닿게 될 사람들의 눈길이 두려웠다. 더 엄하게 언어생활을 단속하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이 가장 바깥 줄의 단서에서부터 차차 우울증까지 건너올 거라는 강박마저 느꼈다.

작은 바람에도 세차게 요동치고 필사적으로 그것을 잠재우는 날들의 반복이었다. 원래도 스스로에게 후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아픈 동안 참 모질었다. 왜 그랬지? 우울증을 앓는 동안 나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해도, 어떤 미친 생각을 해도 아무 타격이 없어서 더 흉폭하게 매질을 했다. 느낄 수 있는 거라곤 명백히 뭔가가 잘못된 이 상황에 어떤 몸부림을 쳐도 달라지는 게 없다는 데에서 오는 두려움뿐이었다. 내 몸을 쪼고 깨트린다고 그 틈에서 진실의 알맹이가 똑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요즘으로 말할 것 같으면 행복한 상황에서는 행복을 느끼고 시간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는 스트레스를 받아서 내 몸이 다시 예전처럼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느껴진다. 그래서 지내기가 훨씬 낫다. 다만 아직 빠지지 않고 있는 우울증의 조각들이, '그래서 이렇게 살다 보면 그 끝에는 뭐가 있지?'라는 질문을 던지면 대답을 찾지 못해 멍하니 생각과 기억 사이를 표류하는 순간이 반복된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 특히 관심과 소문이 모이는 장소에서는 극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귀 주위가 웅웅 울리는 느낌이어서 곧잘 귀 주위를 만지작거렸던 기억이 난다. 혼자될 곳만을 찾아서 헤매는 날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