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섯 번째

그 옛날의 나

by 체리

할 일은 늘 쌓여 있다. 조바심을 내는 것도 허용되지 않을 만큼 쉽지 않은 목표를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쌓아가야 하는 처지이다 보니. 굳이 바삐 움직여 가며 할 일을 찾아내지 않아도 그것들은 언제나 거기에 있다. 그래서 더더욱 '너무 미래를 생각해선 안 돼요. 지금 이 순간을 더 생각할 줄 알아야 해요'라는 의사 양반의 충고가 와 닿지 않았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으면? 신세 망치는 건 나 하나뿐인데. 그런데 일단 몸이 너무 피곤하고, 목표고 뭐고 일단 좀 쉬어야겠기에 지난 주말부터 오늘까지는 그간 놓지 못했던 일들을 완전히 내팽개치고 쉬기만 했다-대신 다른 할 일들을 했지만-. 일터에서 돌아오고 나면 저녁만 먹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고. 10시에 잠들어 7시에 일어나는 생활을 계속했다. 계속 이래서는 안 되니까 이번 주부터는 다시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겠지만.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미래는 여전히 불안 불안하지만.

정말 신기한 일이 있었지 뭔가. 지난주 목요일의 일이다. 나는 우울증의 그늘조차 느껴지지 않는 그 옛날의 내가 되어 하루를 보냈고, 금요일 아침에 눈을 뜨니 그 옛날의 나는 또 그렇게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떠났지만. 희망이란 게 생겼다. 아침은 상쾌했고 나는 말이 많아졌다. 밥을 먹으면서도 핸드폰보다는 사람들 대화에 집중했다. 짜증을 덜 냈으며 멍하게 보내는 시간이 현저하게 적었다. 신나게 떠들고 집에 가는 길에는 정말 오랜만에 술 생각이 났다. 바삭바삭하게 튀긴 음식을 조금 사서 집으로 가자, 집에 가는 길에 있는 그 작은 편의점에서 맥주를 한 캔 사자. 맥주가 흔들리지 않게 조심조심 걸어서 그렇게 집까지 가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맥주를 사서 집으로 갔다. 아쉽게도 바삭바삭하게 튀긴 음식은 하나도 사지 못했지만, 생전 처음으로 편의점 소시지를 샀다. 아마 적어도 한 번쯤은 먹어본 적이 있을 텐데, 그만큼 오래 편의점 소시지를 먹지 않았다는 것이려니 생각한다.


목요일의 내가 대체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술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집 바닥에 푹 주저앉아 먹는 맥주와 소시지는 생각보다 훨씬 맛있었다. 그날의 내게는 식욕이 있었고, 계획이 있었으며 편의점까지 걸어가 그것을 실행할 기력도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한 캔을 뚝딱 마시고 나니 생각보다 기분이 훨씬 좋았다. 집은 너무 춥지도, 너무 덥지도 않아 살짝 달아오른 얼굴을 방바닥에 찰싹 붙이니 금방이라도 잠에 들 것 같았다. 목요일의 나에겐, 수요일에는 없었던 것들이 많이 있었다. 새로 나온 젤리에 우유에 생각보다 많은 것을 샀기 때문에 편의점에서 쓴 금액 치고는 조금 많은 지출을 했지만, 그게 별 대수롭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주 오랜만에 그동안 하지 않았던 일을 하고 싶었고, 들뜬 마음으로 30초 이상 길게 떠든 것도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어제인가, 꽤 끔찍한 꿈을 꾸었다. 나는 가면을 쓰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사람들을 피해 도망쳤고, 도망치는 중에 문을 닫다가 그들 중 한 명의 팔을 문에 끼운 채 버티고 앉아있었다. 손은 느리게 꿈틀거렸으며, 나는 미안함을 느꼈지만 문에서 비켜설 마음은 없었다. 내 생각에 이 꿈은 완전히 개꿈이었고, 너무 의미를 부여할 생각은 없지만 시간이 지난 후 생각해 보니 이 꿈은 요즘 나와 우울증의 관계를 잘 표현한 것이었다. 나는 우울증에 붙잡혔었고, 바짝 붙어 쫓아오는 우울증을 피해 달아나다가 치료한 지 반년이 지난 지금은 적어도 나만의 공간에서 쉴 수는 있을 만큼 거리를 벌렸다. 이 정도면 꽤 잘 해냈어, 그렇게 스스로를 칭찬할 수도 있을 만큼 여유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