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궤도
나는 보통 일요일 오후가 다 되도록 늦장을 부리다가 저녁을 먹은 후에야 붓펜을 잡고 그 주 포스트에 들어갈 그림을 그린다. 스캐너로 스캔을 하려다가 귀찮았던 탓에 책상 위에 둔 그림을 카메라로 찍어 올렸고, 그것마저도 그림 위에 지는 그림자가 신경 쓰였던 탓에 최종적으로는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어 올리는 지금에 이른 것이다. 오늘은 월요일, 해가 쨍쨍할 때 그림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은 얄팍한 양심에도 지각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던 탓이다.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그림자와 햇살과 그림이 잘 어우러져서 마음에 드는 사진이 되었다. 형광등 밑에서 찍을 때와는 많이 다르다.
오늘 길 위의 고양이가 우리 엄마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집에 오던 엄마는 내게 전화를 했다. 친구네 고양이에게 주려고 사둔 고양이 캔을 들고 나오라는 것이었다. 고양이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쏜살같이 달려 내려갔는데, 1층에는 나 말고도 강아지와, (그 강아지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료를 든 모녀가 한 팀 더 있었다. 고양이는 강아지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싫었던 모양이라 결국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은 나였다. 고양이 밥 먹은 뒷정리를 하고 치우는데 동네 미용실 앞과 경비실 드럼통 앞에서 밥과 물그릇을 두 쌍이나 더 보았다. 이 동네 사람들은 고양이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다. 아마도.
치료는 또 완만히 잘 진행되는 것 같다가 몇 달만에 다시 불안 증세를 겪었다. 치료 초기와 동일하게 밤, 자기 전에 찾아왔다. 손이 좀 떨렸는데 이제 곧 냉증이 맹위를 떨치는 계절인지라 가라앉히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나는 여전히 문을 잘 막고 서 있지만, 우울증은 잊을 만하면 다시 문에 몸뚱이를 부딪혀 온다. 내가 여기에 있다고 알려 온다. 꿈자리가 무척 사나웠다. 위 그림은 그 꿈 때문에 그리게 된 것인데, 내가 살면서 안 좋게 만난 사람들이 모두 모여 낄낄 웃으며 현관문을 두드리는 꿈이었다. 꿈속의 나는 (굳이) 문 밖으로 나갔는데, 적어도 그들의 뺨을 한 대씩 때려주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잘 싸웠다고 생각한다. 그날은 유독 잠도 잘 오지 않았는데, 내 약(렉사프로)은 수면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처방받은 2주 분량의 약을 다 먹고 나면 또 다음 진료 시간이 온다. 2주, 또 2주를 버티면서 대체 언제쯤 용량을 줄일까, 치료는 언제쯤이면 끝날까 궁금해 하지만 묻지는 않는다. 결과를 듣고 실망하게 되는 게 싫어서. 그래도 발 밑이 많이 단단해진 것만은 사실인데, 치료가 한 번씩 미끄러져도 견딜 수 없을 만큼 허망해지지는 않는다. 우울증아, 너는 지랄해라, 나는 내 할 일을 할 테니까.
하고 싶은 일이나 해야 하는 일을 내 마음과 다르게 끌고 가는 게 우울증 하나뿐은 아니다. 여기저기 철마다 삐걱대는 곳은 많지만 대표적인 곳이 발목. 한국에 있는 동안 주말마다 물리치료를 받기로 했는데 정신과를 찾는 날에는 토요일에 병원을 두 곳 돌아야 하고, 정신과를 가지 않는 주말도 물리치료 때문에 일찍 일어나야 하기는 마찬가지다. 집에서는 신발을 신고(발목에 충격을 줄이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발목을 움직인다. 언뜻 다시 '궤도'에 기어오른 것처럼 보이다가도 다시 한없이 먼 곳까지 나를 끌고 가는 게 우울증과 조금 닮았다. 이젠 '약하다'는 글자도 왠지 신물 나고, '몸이 약하다'는 걸 설명해야 하는 순간 최대한 덜 진부한 다른 단어를 쓸래도 후보군은 전부 몇 번이나 입에 품은 적이 있는 단어들이다. '왜 또'라는 생각을 하는 것도 지친다. 이쯤 되면 지치는 것에 익숙해질 법도 한데 늘 새롭게 지친다. 대단한걸.
결국은 반복된다. 조금 나아서 기뻐하는 것, 조금 나아진 그 상태가 유지되는 것, 갑자기 발목을 잡혀 또 구덩이 안쪽으로 끌려들어 가는 것, 지쳐 신음하는 것, 며칠을 포기하는 것, 다시 힘을 내는 것.
나라는 세상의 평화는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 하필 또 몸이 안 좋아져서 조금씩이나마 이어왔던 공부를 3주 동안 완전히 놓았다. 영화도 보고, 게임도 하고, 책도 읽을 수 있어서 참 좋은데. 연휴가 끝나면 어떻게 될지 몰라 가슴을 졸이고 있다. 부디 일을 마치고 집에 와 저녁 식사 후 1-2시간 정도는 뭔가를 할 수 있는 상태였으면 좋겠다. 나는 다시 궤도 위로 기어올라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