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겨지지 않는 순간도 분명 있다
이날은 내가 치료를 시작한 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였고, 그럼에도 눈에 띄는 차도가 없어서 조금 초조해하는 시기였다. 설을 맞아 가족과 함께 밥을 먹으러 갔는데 아기 의자에 앉은 작은 아이가 "나는 아기 아니야, 그렇죠?"라고 말해서 아이의 부모님도, 우리 가족도 귀여워서 어쩔 줄 몰랐다. 우울증이 심해진 후로 나는 거의 아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다. 원래 나는 좀 화가 많은 사람이라 지랄도 정성껏 하는 성격인데 화 날 상황이 되어도 아무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 걸 의식하면서 문제가 정말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었다.
이날만큼은 귀여운 것을 귀엽다고, 맛있는 것을 맛있다고, 사랑스러운 것들을 보고 사랑스럽다고 진심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이런 순간은 빈도는 이 후로 점점 더 많아졌다-치료에는 차도가 있었다 물론 정체기도 있었고-. 구겨지지 않는 순간도 있다는 걸 새삼 느낀 건 이 작은 사람 덕분이다. 너는 모르고 있겠지만, 정말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