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두 번째

아주 많은 것들이

by 체리

나는 쓰는 행위를 좋아했다. 쓰는 행위의 결과물로 최고가 될 자신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예나 지금이나 미지근하게 얼버무리겠지만 평생 써나갈 자신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예나 지금이나 내 대답은 정해져 있다. 자신을 담아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는 말처럼 글을 쉴 수는 있어도 평생 쓰지 않고 산다는 것은 남은 평생을 숟가락만으로 식사할 거라 맹세하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어쩌면 숟가락에 관한 비유보다 더.

쓰는 행위에 대한 이런 집착은 자연스럽게 펜과 종이,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키보드에 대한 집착으로 번졌다. 5년 전의 나는 뭐든 생각나면 바로 휴대폰에 메모했고, 메모하기 전까지는 다른 일을 하려 하지 않았다. 가방은 안 들고나가도 주머니에 펜 하나와 작은 종이 조각 하나는 꼭 챙겼다. 그런데 어떻게 그 기분을 잊고 있었을까.


날이 차다. 곧 이사를 나갈 우리 집은 날이 추울수록 물도 차게 식는지라, 서둘러 머리를 감으면서 많은 것들을 생각했다. 언젠가는 온전한 이야기의 형태로 흰 페이지 위에 쏟아낼 것을 꿈꾸면서 저장한 활자들이나, 오랜 기간 잠자고 있던 캐릭터들에 관한 것. 머리를 감는 동안 나는 그 많은 인물들 중 몇 명이 저속한 말싸움을 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픽 웃었다. 물이 차다거나 날이 추워 이가 부딪히고 있다는 사실보다는 상상한 광경에서 오는 순수한 즐거움이 압도적으로 컸다. 정말 오랫동안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덜 마른 머리칼을 내버려 두고 난로 앞에 철퍼덕 앉아 자판을 두들기는 일도 말이다. 나는 나를 잘 알지만, 나다움에 관한 환상은 크지 않다고 믿는데. 오늘의 내가 오랫동안 하지 않았던 일을, 의식조차 하지 않고 이어나갔다는 점은 견딜 수 없이 기뻤다. 미처 배웅도 못 하고 떠나보낸 많은 것들은 그것들이 떠난 날만큼이나 갑작스럽게, 흔한 노크 한 번 없이 돌아와 내 등을 두들긴다.


이사를 준비하며 버리기 전의 신문을 뒤적거리다가 어떤 책의 광고를 발견했다. 우울증을 앓았던 위인들과 그들이 일군 업적에 관한 이야기였다. 눈에 들어온 한 문장에 강한 염증을 먼저 느꼈다. 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던 시절이 있기 때문에 이런 류의 책들이 얼마나 쉽게 '우울증은 강한 의지로 극복해야 하는 것'이라는 무책임한 강요에 이용당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프카가 좀 더 행복했더라면 글쓰기에 대한 욕구는 더 줄어들었을지도 모른다'라고, 책에 실린 위인들이 우울증이나 다른 정신질환을 앓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좀 더 행복하고 좀 더 부족하며 더 평범한 사람이었을 거라고, 광고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일부 동의하는 부분은 있었다. 올해 초만큼 우울증이 심해지기 전, 아마도 8년 전쯤 내가 경미한 우울증을 앓으면서도 무엇이 문제인지 자각하지 못했던 시기 나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요즘 나는 어딘가 이상하고, 종종 붕 뜬 듯한 기분이 내 의지대로 돌아오지 않아 난처하지만 이럴 때면, 뭔가를 쓰고 싶고 사진을 찍고 싶어 견딜 수 없어질 때가 분명 있다고.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이상한 기분이 지속될 때면 햇살이 비추는 세상의 많은 것들이 평소의 배로 아름다워 보였고, 그런 순간이기에 비로소 가질 수 있는 날카롭게 벼려진 감수성이 있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나는 만 나이로 20살이 되기 전에 등단하고 싶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 이상으로, 무엇보다 먼저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었으니까. 내버려 둬서는 안 되었다. 내가 카프카라면, 처칠이라면, 뉴턴이라면, 어떤 정신분석학자가 1993년에 발행한 원고에서 '그들이 우울하지 않았더라면 좀 더 행복했겠지만 어떤 면의 성취는 다소 (우울했던 그들의 실제 삶에 비해) 부족했을 것이다'라고 서술한 부분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행복한 사람의 성취가 우울한 사람의 성취보다 날카로울 수는 없다고, 행복한 사람이 우울한 사람보다 더 비판적일 수는 없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위 책의 저자인 앤서니 스토는 이미 고인이다. 따라서 나는 그에게 이메일을 보낼 수도 없고, 우리는 이미 엇갈렸으므로 그가 나의 존재를 의식하는 일은 영영 없을 것이다. 그래도 많은 것들이 지나간 지금 내가, 8년 전의 나보다 더 괜찮은 걸 쓸 수 있다면. 행복한 나라도 8년 전의 나보다 아름다운 모습을 그릴 수 있다면 내게는 아주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내가 원하는 성취를 거머쥐기까지, 우울증이 아무리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해도 나는-우울증이 이들 성취에 어떤 도움으로 작용했다는 전제 하에-덜 똑똑한 윈스턴 처칠과 글 못쓰는 프란츠 카프카의 별에서 살고 싶다. 그리고 나도 그들 중 하나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