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보관법
좋은 소식이 생겼다! 지난주부터는 이틀에 한 번씩 약을 먹게 되었다. 보통 병원을 한번 방문하면 2주 분량의 약을 받기 때문에 이번에 받은 약을 한 달 동안 복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틀에 한 번씩 전략을 일주일 동안 실천해본 결과 대단한 변화는 없지만 몸이 조금 나른하고, 다행히 염려했던 어지럼증은 -아직-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치료 초기에 매일 경험했던 밤의 불안 증세가 가끔 나타나는 게 느껴진다. 전만큼 불안 때문에 잠을 이루기 힘들 정도는 아니지만 불안감을 느끼면서 잠들기 전까지 한 자리에 쪼그려 앉아 있었고, 다른 일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도 전과 비교했을 때 느껴지는 차이라면 그런 증세가 대단히 무섭게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안 괜찮을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제는 아니까. 완전한 통제는 어렵지만 내 생활은 지킬 수 있다. 그저 지난 2주 동안 조금 무기력해졌다는 사실이 신경 쓰인다.
의사 선생님은 "안 좋을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죠?"라고 했다. 물론이죠, 알아요. 그 사실이 그대로 나의 힘이 되었다. 지난주에 나는 탕비실로 가는 짧은 길에 경험한 불안 증세에 관해 이야기했다. 채 50보가 되지 않는 거리를 걸으면서 나는 가쁘게 숨을 쉬다가, 싱크대를 짚었고, 또 의자에 앉아 그것을 가라앉혔다고. 지속되지 않을 것을 믿었기 때문에 괜찮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불안이 널뛰었던 치료 초기에 이런 말을 했다면 허세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었겠지만, 허세가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보다 나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영화에서 악당을 때려잡는 히어로들처럼 가슴을 펴고 우울증을 뚝딱뚝딱 때려 부시지는 못하겠지만, 휘청휘청 꼴사나울지언정 그것을 흘려보내고야 말 거라는 사실은 내가 잘 알았다. 그러니 괜찮았다. 1년 전에 미래를 생각할 때 '고통'이나 '지속될 공허함'이 제일 먼저 생각났다면 요즘은 '지금이랑 비슷할 것', '그냥저냥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이 먼저 난다. 나는 변했다.
오늘 연재 분량은 '기억의 보관법'을 다루고 있지만 그렇다고 내가 정신론을 설파한다는 불쾌한 오해는 받고 싶지 않다. 치료 초기에 나는 미래를 생각할 수 없었고, 중반에 와서는 의심 섞인 기대를 가지고 미래를 대했다. 지금은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한 미래는 오고, 내게 도움을 청할 힘이 있다는 것을 안다. 지금 이 단계에 왔기 때문에 우울증이나 불안 증세에 관한 나의 기억을 어떻게 편집해서 장롱에 쌓아놓을지 고민할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내 원고를 보면서 다양한 우울증의 양상 중의 하나가 글쓴이에게 나타났고, 치료의 과정은 어떠했다는 간접적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여러분 치료에서 참고 자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전문가들조차 치료 과정에서 실수를 한다. 이런 경우 우리는 도움을 청할 사람을 바꾸고 새로운 방법을 시도한다. 하물며 자격이 있는 사람들도 실수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을 위해. 책이나 블로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다른 우울증의 사례를 지켜보고 때로는 공감하되 그것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다만 한 가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의지의 강약은 정신질환과 상관이 없다고. 총을 살살 맞으면 안 아플까? 통증을 자각하는 것이 의지의 문제인가? 칼에 찔린 사람이 '나는 지금 칼에 찔렸다는 현상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통증을 느끼는 것뿐이다'라고 생각하던가? 아니다. 우리는 유독 보이지 않는 상처에만 잔인하다. 병원 문은 휴일을 제외하면 늘 열려 있다.
치료 이야기로 돌아가서, 의사 선생님은 "공황이나 불안이 일어났다는 사실만 기억하지 마세요. 불안 증세가 일어났지만-지나갔고-나는 괜찮았어, 거기까지 같이 기억하려고 해 보세요. 나중에 돌이켜볼 때 그런 극복의 기억이 힘을 길러주니까요."라고 했다. 내 기억 편집소는 이미, 굳이 노력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극복을 중심으로 기억을 가공하고 있었다. 1년 전, 치료 초기에는 전후 사정까지 같이 붙여서 보관할 여유가 없었다면 지금은 보관 공간이 많이 늘어난 탓에 불안이 언제 일어났는지, 얼마나 지속됐는지, 나는 뭘 했는지, 그래서 기분이 어떤지까지 묶어서 기억한다. 방점은 늘 마지막 부분에 찍힌다. 나는 그때 뭘 했고 그래서 기분이 어떤지. 최근의 불안에 나는 울지도 꺾이지도 않고 그저 마주한다. 그것들이 지나갈 것을 알고, 나는 많이 나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