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다음의 다음을 믿기
어찌어찌하다 보니 이삿짐센터 여러분이 나의 약을 엉뚱한 곳에 수납하여 복약 일정이 생각과 달라지기는 했지만 약은 이제 두 알 남았다. 정확히 말하면 2회분이고, 1회에 반알을 먹기 때문에 총 한알이 남은 거지만 그냥 두 알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니 이해를 바란다. 아무튼 이 2회분의 약을 4일에 걸쳐 먹기 때문에 4일이 지나면 이번 우울증 치료를 위한 복약 일정은 끝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신 먹을 일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매일 위장에 가해지던 일정량의 부담이 덜어지는 것이다.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진통제와 렉사프로의 상호작용 효과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얏호! 매우 기쁘지만 이와는 별개로 약을 줄이고, 또 끊는 단계에서 어지럼증과 구토감, 선명한 개꿈의 현저한 증가를 체감하고 있으므로 이 증상이 개선되기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잘 모르겠다. 처음부터 강렬한 구토감을 부작용으로 선사했던 브린텔릭스는 한때 위경련 때문에 복약을 중단했을 때 어지럼증을 느끼게 하지는 않았는데, 복약 초기부터 부작용이 없었던 렉사프로는 복약을 중단하면서 상기의 증상들을 느끼게 만들고 있으므로 매우 이상한 일이다. 그래도 나머지 2회분의 약을 먹고 나면 화장실이나 아무도 듣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게 "조까, 세상아"라고 말할 예정이라 아주 설렌다. 조까! 후후후.
별로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지만 장소와 상황과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저 요새 우울증 약 먹어요"라는 말이 나에게 불이익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초기에는, 심지어 처음 간 병원에서도 "정기적으로 먹는 약 있나요?"라는 질문에 사실대로 답하기가 꺼려졌다. 그래도 1년쯤 되는 기간 동안 많은 병원에서 내게 정기적으로 먹는 약의 유무를 물었기 때문에 많이 적응이 되었다. 며칠 전 위장 내시경을 진행한 내과 의사 선생처럼. 그는 수면에 관여하는 성분을 포함한 항우울제가 마취의 지속 시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자꾸만 겁을 줬는데 렉사프로에는 수면 관련 성분이 없어서, 깨어난 후 얼굴이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했던 것을 빼면 괜찮았다. 아무튼, 미처 의식해볼 기회조차 없었는데 의사 선생이 일깨워 주었으니 가능하다면, 수면을 돕는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있는 경우 수면내시경 전에 담당의와 상담해보는 것이 좋겠다.
삶은 늘 그랬듯 좋은 부분도 있고 나쁜 부분도 있다. 내 퇴사 처리를 알아서 잘 해주겠다고 세 번이나 장담했지만 세 번이나 날 배신한 파견 회사처럼 말이다. 제발 하겠다고 말한 일은 해주세요. 몇 주째예요 지금. 사랑해 마지않는 어머니는 몇 주 전엔가 내게 '이제 정신 좀 차리고 살아가야지'라고 했지만 무슨 뜻이었는지는 대충 알 것도 같고 어머니가 살아온 시대를 생각하면 우울증 환자에게, 위의 것보다 더 해서는 안될 말을 하지 않은 게 다행인 것도 같아서 알아들은 척했다. 그래요, 나도 사랑해요 엄마. 거의 20년 동안, 생리 때마다 먹었던 진통제에 알레르기가 생겼다. 이제 난 이부프로펜이 들어간 진통제를 먹으면 콧구멍부터 두피까지 벅벅 긁어대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프록센이라는 진통제를 먹기 시작했는데 이놈이 이부프로펜이랑 사촌(둘은 같은 NSAID: 비스테로이드 항염증제)이라서 이부프로펜에 알레르기가 있으면 나프록센에도 같은 반응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와우-타이레놀(아세트 아미노펜)이 있지 않냐는 독자분이 있겠지만 타이레놀은 20년째 한결같이 효과가 없다-. 죄 나쁜 부분만 말했지만 요점은 내가 기대한다는 거다. 그다음의 다음의 다음에 오는 것을. 10년 후는 아닐지라도 1년 뒤를, 그리고 3달 뒤를. 그 존재 여부 자체에 대한 의구심 없이 기대한다는 것이다.
1년을 치료받고 나니 이젠 죽을 생각이 안 드느냐고 물으면 그렇지는 않다. 아주 옛날의 걱정 근심 없었던 내가 종종 했을 정도의 빈도와 강도로 그런 생각을 한다. 그리고 곧 그 생각을 치워버린다. 나의 의지와 판단으로. 나는 대학 다니는 내내 그룹과제 운이 좋았던 편이 아니다. 그중에도 최악이었을 때는 학교를 취미로 다니는 부유한 멍청이와 그룹과제 전날에 연인과 헤어져서 모임 내내 울어댔던 멍청이와, 원하는 수업에 못 들어올 것 같아서 부자 남자 친구-이놈은 취직을 해서 그 학기를 등록할 필요조차 없었는데-를 시켜 자기 시간표에 포함된 모든 수업을 수강 신청해달라고 부탁한 멍청이와 한 조가 되었을 때다. 이렇게까지 미친 조의 일원이 되는 건 내게도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조까, 하면 하는 거지, 징징거릴 시간 없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자신을 밀어붙이는 게 좋다는 뜻은 절대로 아니지만 역설적이게도 요즘 내가 자신에게 '조까! 하면 하는 거야 빨리 스케치북이나 펴' 따위의 위협을 속삭이는 걸 보면 보면 웃음이 난다. 진심으로 화를 낼 수 있고 울 수도 있다. 요즘의 나는 불편을 느끼면 당장 개선할 마음을 먹고, 집중력은 오래도록 유지된다. 하루 이상의, 심지어는 일주일 이상의 시간을 내 의지대로 계획하고 편성해서 원하는 결과까지 끌고 갈 수 있는 힘이 있다. 누군가에겐 이것이 '그래 뭐 그건 남들도 다 하는 일이지만 네가 그렇게 행복하다면야' 정도의 일이겠지만 그 '당연해 보이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몇 년간의 치료를 거치더라도 손에 넣고 싶은 절실함 그 자체라는 건 매일의 궤도에서 떨어져 본 사람이 아니라면 알기 힘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