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여섯 번째

실내 서핑장에 사는 기분이야

by 체리

드디어 약을 다 먹었다! 렉사프로나 브린텔릭스가 일으키는 부작용이 다른 강한 약에 비교했을 때 심각한 수준은 아니지만 1년 넘는 기간 동안 약을 먹는다는 사실이 위에 부담을 주었기 때문에 약만 다 먹고 나면 떡볶이도 먹고 비빔냉면도 먹고 한 번에 두 끼씩 먹을 수도 있을 거라는 나의 기대와는 달리 아직은 위가 더부룩해서 식사량을 줄이고 있다. 슬픈 일이다. 하지만 내 위는, 집안 대대로 예민하기 때문에 정신과를 찾을 예정인 분들이 이 글을 보고 너무 걱정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정신과 치료를 시작할 때 나는 모든 것을 현실보다 더 간단히 인지하거나 예상했는데, 현실은 그 상상보다는 복잡한 것이었다. 작년에 지출한 의료비를 살펴보니 55만 원이 조금 넘는 금액이었다. 이것도 적지 않은 금액이지만 해가 바뀌면서 추가된 금액을 감안하면 우울증 치료는 만만하지 않은 금전적 타격을 안겼다. 저녁마다 더부룩한 속 때문에 어지러움을 느끼며 잠자리에 들고, 액상으로 된 소화제를 달고 사는 입장이라 찜찜함을 느낀 나머지 내시경 검사를 하게 된 것이다(다행히 내시경 검사 결과는 좋았다). 나는 이제 29살이다. 22살의 나는 불안감이 내 두피를 잡고 발끝까지 끌어당길 때면 의식이 끊어질 때까지 술을 마셨었는데, 알코올이 감정의 진폭을 어마어마하게 넓혀놓는다는 것을 깨달은 후로는 술을 끊다시피 했다. 22살일 때도 건강은 좋지 않았지만 그때의 젊음이 아슬아슬한 건강을 겨우 붙들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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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약을 다 먹었다. 약만 다 먹으면 다 끝날 줄 알았지만 애석하게도 인생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일상생활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아직도 발밑이 불안하다. 끝없이 움직이는 서프보드 위에서 균형을 잡으며 살아가는 기분이다. 대개는 아무 일도 없다. 그래도 책상에 앉음과 동시에 불안하게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거나 오랜만에 마신 커피 한잔에 오후 내내 감정이 요동치는 게 느껴질 때면 딱 참을 수 있을 만큼 무서워진다. 아침이 되면 느끼는 두통이나 평소 같지 않은 꿈들도 마찬가지다. 약효가 나타날 때까지 2-3주를 기다려야 했듯, 약과는 상관없는 내 생활을 하기까지도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려야 하는 모양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그래도 차이는 있다. 1년 반 전의 내가 반드시 전문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태였다면 지금의 동요나 불안은 스스로 진정시킬 수 있는 수준의 문제라는 것이다. 아주 큰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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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스러운 이야기를 먼저 했지만 긍정적인 변화도 분명히 있다. 나는 즉흥적으로 떠오른 계획을 들고 집을 뛰쳐나가기도 했고, 아주 오랜만에 화장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겨울이 된 후 처음으로 롱 패딩을 벗어던지고 코트를 입기도 했다. 거울도 봤다. 그동안 거울을 아주 안 본 것도 아니건만 무척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했다. 거울 속의 나는 살이 조금 쪄있었고, 나는 또 새삼스럽게 놀랐다. 갓 한국에 돌아왔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그때의 나면 툭 치면 박살나기라도 할 것처럼 창백했으니 말이다. 아아, 심지어 며칠 전에는 얼굴에 팩을 하기까지 했다. 마지막으로 팩을 한 게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을 지경이니 위의 사건들은 결코 작지 않은 변화다! 우울증이 심화되면서 나는 아래와 같은 변화를 겪었다.


- 사람들과 만나지 않으려 했고(원래도 집을 좋아했다)

- 화장을 하지 않았다.

- 자주 식사를 걸렀고 (원래도 위가 아플 때면 식사는 걸렀다)

- 살이 6kg 정도 빠졌다.


그래서 사람들이 눈치챌 수 있는 변화라고는 살 정도밖에 없었다. 제일 친한 친구마저도 내가 또 아프다고 하면 늘 있는 일이라 생각할 정도였으니 사람들이 우울증보다는 다른 병명을 먼저 떠올린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우울증을 얻은 것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우울증에서 빠져나와 생긴 변화는 바로 눈치챘다. 하긴 매일 롱 패딩만 입고 주머니에는 장갑을 쑤셔박고 다니던 사람이 코트를 입고 나오면 누가 눈치채지 못하겠냐만은.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영 손이 가지 않던 화장 브러시에 손가락이 가 닿은 것도, 전처럼 혼자 신나게 외출할 마음이 생겨난 것도. 발밑의 움직임이 영 생각 같지 않을 때는 조금 불안한 것이 사실이지만. 파도를 하나 타 넘고 나면 해냈다는 기분이 든다. 행복하지만 자는 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기 때문에 꿈을 너무 많이 꾸는 증상과 아침의 무거움이 어서 나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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