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앞의 소회
서른은 모든 것의 완성을 의미하는 숫자처럼 보였다. 적어도 20대 초반 때까지는 그래 보였다. 어딜 가나 '내 자리'가 있고, 내 의자는 꽤 굳건히 네 다리를 뻗어 땅을 딛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런데 진짜 서른은 어떤가! 아니, 애초에 어른이라는 건 뭐지. 종이에 어른이라고 쓰면 집도, 차도, 멋도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만 같은데 그 셋 중 아무것도 없는 서른 코앞에 따라오는 건 급증한 사유(思惟) 뿐이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우리에게 대학 외의 길은 없다'라는 압박감이 너무 싫었다. 세상은 그보다는 넓을 텐데, 단 하나의 선택지 외에는 아무것도 인정받지 못하는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시야를 좁게 만들었다. 꿈으로 달리는 사람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 길을 공포에 질려 달렸다. 대학에 가지 않으면, 취직을 하지 못하면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거라는 공포에. 나는 급하게 떠밀려 내린 결정만큼 탈 나기 쉬운 건 없다고 믿는다. 아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많을 거다. 그런데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들 대부분을, 급하지는 않을지언정 무언가에 떠밀려 가며 내리는 모습은 어이가 없을 만큼 흔했다.
그때의 내게 젊음은 -비교적-있었지만 용기와 여유는 없었다. 길 앞에 섰을 때는 분명 영상과 글 사이에 서서 내 것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는데, 몇 곳인가의 회사를 거치는 동안 그 바람에는 녹이 피었다. 글을 써서 먹고산다는 게 얼마나 신화에 가까운지는 잘 알고 있었고, 영상으로 먹고사는 생활의 질이 어떤지는 안 봐도 4K였다. 좋아하는 일로 먹고살기가 쉽지 않아서 애매한 일로 애매한 생계를 이어나가 보겠다는데 이게 이렇게나 지칠 일인가. 왜 펜과 카메라 사이가 아닌 차장과 광고주, 그리고 본부장 사이를 걷고 있는 건지 한없이 궁금해질 때쯤 만난 게 다니엘이었다.
신기했다. 그 먼 나라에서 태어나 다른 길을 걸어온 사람 둘이 관계에서 느끼는 불안과 진로에 대한 허무함을 제 것처럼 공유할 수 있다는 게. 당장 검색창에 진로, 20대 후반만 검색해도 무수한 결과가 나오는 만큼 이 고민이 나만의 것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지만 인터넷상에 흩뿌려진 고민의 데이터가, 그 뒤에 있는 사람의 존재를 투영하지도 않았다. 결국 혼자 감내해야 할 불안이었고, 인생이라는 넓은 바다에서 아직도 진로 고민에 허우적대는 걸 들키고 싶지도 않았는데 우연히 지구 반대편에서 온 다니엘의 쪽배가 내 뗏목에 쿵 부딪혀 올 때의 깨달음이라니.
그로부터 몇 년이 더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글과 영상 그 틈새의 내 것을 찾아 헤매고, 다니엘 역시 퇴사 타령을 노동요로 하며 꾸역꾸역 회사를 다니고 있다. 서른을 코앞에 둔 지금, 적어도 서로를 찾아냈다는 사실만이 나름의 위안이다. 유래 없이 넓은 공간에서 뭐든 꿈꿀 수 있는 이 시대에 서른이 다 되도록, '되고 싶은 나'의 초상을 찾아 헤맨다는 것은 가끔 역설적으로 느껴진다. 운이 좋다면 올해가 지나기 전에 다시 애매한 생계와 작은 꿈 사이에서 위태롭게 걸을 수 있을 것이다.
*만으로 따지면 아직은 스물일곱이기 때문에 이번 제목을 경계의 서른이라 해도 되는 걸까 싶었지만 해가 바뀌는 순간 내 나라에서는 서른이 맞기 때문에 그냥 그런 걸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