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하고 아름다운 평화의 길 올레
# 19 km
# 표선 해수욕장 ~ 남원포구
# 상징 : 표선 해수욕장
# 표선 해수욕장 ~ 토산 산책로 : 21년 6월 30일 14시 40분 ~ 18시 50분 (4시간 10분)
# 토산 산책로 ~ 남원포구 : 21년 7월 1일 11시 ~ 14시 50분 (3시간 50분)
나의 올레길 바이블인 「 제주올레 가이드북 」에 따르면 소요시간은 5~6시간이며 난이도는 중에 속한다.
https://www.jejuolle.org/trail/kor/olle_trail/default.asp?search_idx=6
성읍 민속마을과 한중옥 크레파스 미술관을 보고, 점심까지 두둑하게 먹었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가뿐하게 4코스를 시작하려고 했더니 홍차가 맛있는 집이 있대서 어물전 못 지나치는 고양이처럼 들어간다. 한 동안 걷다가 나타나면 더 좋았겠지만. 시작하기 전에 밍기적 거리는 이 여유로움도 좋다. 꼬닥꼬닥 그 누구보다 간세다리처럼 걷는 나만의 올레길이다.
오늘도 평화로운 표선 해수욕장을 바라보며 14시 40분 3코스 종점이자 4코스 시작점에 있는 올레 공식 안내소에서 올레길을 시작한다.
이름도 귀여운 당케포구를 지나 바다에 다가간다. 독일어 같은 당케는 ‘당이 있는 케(경작지)’라는 뜻이다. 여기서 ‘당’은 ‘할망당’을 가리키는데, 제주에 있는 수많은 할망신 중에서도 ‘설문대할망’에게 비는 곳이다. 그런데 당은 어디 있을까? 찾지 못하였다.
표선 해녀들의 얼은 몸을 녹여줬을 불턱 옆에 현대식의 해녀탈의장이 있다. 뒤로는 해비치 리조트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 올레길은 돌로 가지런하게 길이 나있다. 올레길을 사랑하는 누군가의 수고로움이 아름다운 길을 만들어놓았다. 아마 여름과 가을에 태풍이 오면 이런 돌길들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이 길을 보며 태풍을 걱정하는 것은 부정적 성향 때문이 아니라 길을 만들어주신 분에 대한 감사가 우러나와서다.
해녀상과 연대 그리고 등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의 해녀상은 보기 좋지 않았다. 보통의 표준화된 해녀상은 '눈'을 잡고 있고, 테왁을 들고 있다. 근데 이 해녀상은 테왁도 없고, 쓸데없이 팔을 치켜들어 머리에 대고 있으며 몸을 비틀어 과도한 곡선을 만든다. 여성의 몸만을 강조한 느낌이라 불쾌했다. 해녀는 젊고 탱탱한(정말 여성의 몸을 고기나 생선에 빗대는 표현이다) 그래서 섹시한 미녀로 이미지화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게 해주는 해녀상이었다. 그런데 더 서쪽에 있는 등대 가까이 위치한 해녀상은 더 가관이었다. 해비치 리조트 측에서 세운 건가?
해녀 상의 '표준''모델'이 필요한가, 이를 만드는 조각가는 육지인이어도 되는가 등에 대한 문제에 대해선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겠다. 거기까진 내가 건드리지 못하는 문제일 듯하다. 하지만 해녀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가 형성되고 해녀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해녀가 왜곡되어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저런 해녀상은 옳지 않다.
https://www.newsje.com/news/articleView.html?idxno=203034
잠시 흙길을 떠나 해안도로 쪽으로 나와서 갯늪을 지난다. 여기의 주인은 자기들이라는 듯 새들이 고개를 빳빳이 세워 지키고 있다.
다시 돌과 흙으로 된 길로 들어간다. 모래 색깔이 하얗기도 하고 갈색으로 변하기도 한다.
모래와 바위를 밟고 가던 길에서 해안도로 시멘트 길로 올라가는 길목에 love for planet 표시와 함께 귀여운 간세가 얹어있는 액자가 있었다. 이보다 아름다운 작품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멋진 풍경이 사각형 안에 들어간다. 다회용 플라스틱 용기를 업사이클링하여 만든 벤치가 있다. 이곳에서 해녀 한 분을 마주쳤다. 어디서 왔냐고 반갑게 인사를 해주신다. 너무 젊어 보이셔서 해녀 삼촌 이실 줄 상상도 못 했는데, 알고 보니 60대셨고, 해녀 경력 40년의 베테랑이시다. 평소에도 물질이 일찍 끝나거나 밭일이 없을 때 하루 50분씩 걸으신다는 미소가 빛나는 멋진 해녀를 올레길에서 만났다.
대화가 길어졌고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눴다. 이에 용기를 내서 예민한 주제일 수 있는, 하지만 내가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입안에서 굴리다가 내뱉었다.
"제가 너무 궁금한 게 있는데요. 해녀 삼촌들 물질할 때 남자들은 뭐해요?"
"뭐하긴. 그냥 술 마시고 놀아."
"배 타고 나가서 고기잡이도 안 해요?"
"그것도 젊어서야 하지 그냥 놀아. 우리 아버지도 술 마시다 돌아가셨어. 원래 그래. 노는 걸 좋아하니까."
정말 모르겠다. 나도 노는 거 좋아하는데. 노는 거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올레길을 걸으며 풍중도 많이 봤다. 해녀들이 올라오는 길에 트럭이 몇 대가 주차되어 있었고, 주차 해 놓은 옆에서 수다 떨고 있는 모습들. 가끔 한 번씩 바다를 쳐다보던 모습들. 아마 앞으로도 이 분들의 생활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곳의 역사고 이곳의 문화이다.
표선 어촌계는 동으로 동상, 동하, 서상, 서하, 한지 5개의 바다밭으로 나눠서 들어가고 어머님께서 들어가는 곳엔 총 12명의 해녀가 소속되어 있으나 지병 등의 이유로 8명 정도 물질을 나가신다. 지난번 3코스 온평리에서 가장 많은 해녀들이 물질하는 모습을 목격했는데, 여기는 10명도 채 안 되는 해녀 수라고 하니 놀라웠다.
해녀학교에 다니고 있다니 젊은 서울 처자들이 해녀학교 다니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해녀는 정말 힘들고 천한 일이라고 하신다. 또 요 몇 년 간 깊은 바다 소라는 다 죽고 전복도 거의 없어 돈벌이도 너무 안 된다며 왜 해녀학교를 다니고, 왜 해녀가 하고 싶은지 이해 못하겠다며 고개를 저으신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에다 전 세계 사람들이 열광하는 제주 해녀들은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이 없으시다. 많은 해녀 분들은 원해서 해녀를 하셨다기 보단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해서 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해녀에 대한 자부심보다는 부끄러움이 많다.
"내가 딸이 있으면 절대로 해녀 안 시켜."
해녀학교에서도 많이 들었던 말을 또 들었다. 내가 해녀와 풍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아마 해녀 삼촌들은 내가 가지는 해녀들에 대한 신비로움과 경외심, 존경심, 자긍심 그리고 '해녀'를 떠올리기만 하면 차오르는 눈물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실 것이다.
요새는 성게철이고, 모레부터 물에 들어가셔서 내일은 귤밭에 농약을 뿌려야 한다신다. 성게는 물에선 네 시간 일하지만 나와서 그보다 훨씬 오래 일하신다고 하신다. 성게를 까기 때문이다.
"성게 까는 거 해녀 삼촌들이 안 하고 횟집에서 하면 안 될까요?"
"횟집은 못 까~ 우리가 잘 까지."
왠지... 항상 을의 위치에서 착취당하던 해녀들이 성게 잡이에 더해 성게 다듬기라는 일까지 언젠가부터 넘어온 게 아닐까 하는 편파적인 의심을 해본다.
결혼한 지 4년 만에 남편이 죽고, 홀몸으로 아이 둘을 기르기 위해 해녀 입문엔 늦었다 할 수 있는 이십 대 후반에 해녀가 되셨다. 어깨너머로 곁눈질해서 배우며 해녀 공동체의 텃세를 2년 동안 눈물로 버티며 상군으로 성장하셨다. 다행히 해녀들의 고질병인 두통과 이명은 없으시다. 말벗하며 표선 쪽으로 걷자는 말에 선뜻 그러겠다고 나섰다. 어머님 집 방향으로 꺾으신 후에 역방향으로 어머님과 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정방향으로 걸어 돌아왔다. 갔다 왔다 갔다 했지만, 길 위에서 짧게 만난 해녀 삼촌은 잊지 못할 것이다. 낯선 이를 많이 어색해하는 성격이라 더 살갑게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이 아쉽다. 적적해하시는 모습이 대화나 표정에서 느껴져서 더 마음이 쓰였다.
해녀 삼촌을 만났던 love for planet을 지나 해양수산연구원도 지나서 표선 해녀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동영상을 찍어볼까? 하고 가방에서 짐벌 셀카봉을 찾는데 없다! 이럴 수가! 산지 얼마 안 됐는데! 어머님과 얘기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두고 왔나? 싶어 도로 love for planet으로 약 2km 정도를 전속력으로 뛰어갔다. 4코스는 이상하게 왔다 갔다 하네 하면서 심장이 터지도록 뛰어갔고, 다행히 짐벌은 내가 앉았던 곳에 무사히 있었다. 여기서 또 한 번 더 고민했다. 이건 여기까지만 걷고 표선 해수욕장으로 돌아가라는 설문대할망의 뜻 아닐까? 전속력 달리기로 뛰는 심장을 달랠 겸 다시 정방향으로 가보기로 한다. 나를 막아서는 듯한 징조보다 뚫어보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4코스는 특히 새카만 현무암들을 실~컷 볼 수 있는 곳이다. 너른 검은 현무암 빌레가 펼쳐지는가 하면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온몸으로 맞이하고 있는 우락부락한 애들도 있다. 정말 시원한 풍경이다. 4코스의 이 바당 올레는 여름이 찰떡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서상동 해녀의 집은 풍경이 여태껏 올레길을 다니며 본 해녀의 집 중에서 최고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지나쳤다. 바다를 향해 마치 낚시꾼처럼 서 있는 새 한 마리가 제주의 풍경과 어우러진다.
현무암 빌레가 넓어졌다 좁아졌다 파도와 바람에 더 많이 깎였거나 덜 깎였거나 등등의 모습을 보여주던 용암류의 흔적이다. 갑자기 아아용암으로 바뀌면서 높이도 높아졌다. 표선면 세화리에 속하고 가마포구로 이어지는 이 아아용암 길이 4코스 전반부에 가장 멋진 길이다.
가시천과 바다가 만나는 가는개를 건넌다. 비가 많이 와서 물이 차면 건널 수 없는 곳이지만 장마가 시작되기 직전의 기간이라 수풀과 꽃이 무성하다. 가는개를 건너면 행정구역상 세화 2리가 되고, 세화 2리의 옛 이름은 가마리다.
역시 바당숲길은 좋다. 숲 속이지만 파도 소리가 들리는 느낌은 올레길에서만 느낄 수 있는 풍취이다.
올레길 한 중간에 도망도 가지 않고 뻗어 쉬는 고양이가 있었다. 예전에 길고양이를 만졌다가 이를 옮아 한참을 긁으며 살고 결국 서캐빗으로 박멸했던 적이 있어 너무 예쁘지만 만지지는 않는다.
이곳은 가마리 해녀들이 물질을 위해 바다로 나가던 길이다. 이곳을 제주올레가 복원하였고, 이때 제주지역방어사령부 소속 93대대 군인들이 길 조성에 도움을 주어 '해병대길'로 부른다. 해병대길이나 특전사길과 같은 길 내는 이야기는 서명숙 이사님이 쓴 책에서 재미있게 읽었어서 기대가 되었다. 이 길은 소노캄제주리조트에서 조성한 길과 만난다.
이렇게 흙길이 아니라 포장된 바닥이 나오면서부터가 소노캄 제주 리조트의 산책로이다.
올레길도 거의 막바지가 다 되다 보니 이제 표식 찾기도 도사가 다 됐다. 대충 흘끗 보고도 저기구나 알고 50미터밖에 표식도 알아본다. 토산포구를 지나 일주동로 버스정류장이 가까운 지점에서 18시 50분 4코스의 전반부 약 8km를 걷고 마무리하였다.
9시 반 오픈 시간에 맞춰 김영갑 갤러리를 보았다. 사진은 예술일까라는 질문에 대해 이어지는 의문들로 나만의 답도 찾지 못한 상태였지만 그의 사진은 멋졌다. 갤러리에 전시된 사진도 좋았지만, 김영갑 작가 본인이 직접 꾸민 갤러리도 작품이었고, 갤러리를 한층 더 고즈넉하게 만들어주는 토우 작품들도 매우 좋았다.
몇 만장에서 몇 십만 장이라는 그가 찍은 사진 수에 비해 너무 적은 사진만 전시되어 있는 것 같아 아쉬웠다. 그래서 사진첩에 거금을 지르고 마음은 풍요롭게, 지갑은 메말라서 나왔다.
11시 전날 멈췄던 지점에 주차를 하고 4코스 나머지를 걷기 시작하였다. 산열이통과 해녀탈의장을 지나 일주동로를 가로질러 마을길로 들어간다. 토산 1리는 웃토산이고, 토산 2리는 알토산이라는 옛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알토산 마을 역시 4.3의 기억이 있다. 그것도 처절하게 말이다. 18세에서 40세까지의 남자들이 몰살당했다. 이들이 죽임을 당한 곳이 바로 표선 해수욕장과 제주민속촌을 끼고 있는 한모살이다.
한모살은 제주올레길에는 속해있지 않다. 표선 한모살은 표선도서관 앞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총살당했다. 표선리에 소재한 면사무소에 군부대가 머물렀기 때문에 면사무소 앞에 유치장이 있었고, 유치장에 끌려왔던 주민들 대부분이 이곳 한모살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을 당하였다. 이렇게 제주 4.3 유적지 표시가 있고 다른 기념비 등은 없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이 공간이 먹먹하다.
구부러지는 송천을 두 번 지나면 토산리에서 신흥1리로 넘어간다. 역시나 메마른 제주의 하천이다.
바다를 향해 내려오면 신흥 앞바다가 나온다.
가까운 카페에서 목을 축이며 잠시 쉬고 서쪽에 신흥리 포구를 향해 다시 걷는다. 신흥천을 지나면 태흥리가 되며 쪽빛 제주 바당 올레가 이어진다.
태흥3리에 속한 작고 귀여운 덕돌포구를 지나 하천과 바다가 만나는 태흥 2리가 나온다.
옥돔마을로 유명하며 6시 내고향에 2회 연속 방영되었음을 매우 축하하는 글귀가 쓰여있는데 너무 귀여웠다. 마을특화사업으로 '당일바리 옥돔'을 명품화하는 사업 계획이 진행 중이다.
태흥 2리에서 종점인 남원포구까지 이어지는 해안 올레는 정말이지 아름답다.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바뀌는 흙, 돌, 바다, 하늘 그리고 공기. 들숨에 건강과 날숨에 재물이 들기 바라는 밈처럼 올레길은 들숨에 행복과 날숨에 행복에 채워지는 공간이다. 이런 space가 존재할 수 있는 걸까? 숨 막히는 아름다움에 행복이 가득 차오른다.
의귀천은 공사 중이었다. 하천재해 예방사업의 일환으로 공사 중이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사진에 보이는 의귀천 배고픈 다리를 건너는 기존의 올레길이 공사로 밋밋한 태흥교를 건너게끔 바뀌었다. 자연은 건드릴 수록 더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모르고, 하천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과 자연 본연의 정화기능을 왜 깨닫지 못하는가. 아름다운 올레길에서 포크레인이 땅을 헤집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내 가슴을 찍는 것과 같은 아픔이 느껴진다.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329212
17km 지점인 벌포연대를 지나는데, 육지 쪽으로 들어온 만의 풍경이 환상적이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제주 바다 색이다.
4코스에선 가시천, 송천, 신흥천, 의귀천을 지나고 마지막으로 서중천을 건넌다.
계속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다.
4코스의 종점은 남원포구이다. 이곳에서 해녀의 길 올레 4코스는 끝이 난다. 19km의 길었던 4코스. 하지만 다른 올레길과는 다르게 물질하는 해녀 삼촌이 아닌 육지에서의 해녀 삼촌을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특별한 곳이다. 그래서 그런가 표선에 자꾸 시선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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