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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여해 Sep 01. 2021

기당미술관 ⌜날씨의 까닭⌟ 전시

제주의 여름 날씨는 순응할수밖에없다

미술관에 가는 날씨의 까닭



저번에도 흐린 날 방문했던 기당 미술관.  ⌜날씨의 까닭⌟ 전시 제목에 걸맞게 저번과 똑같은 날씨에 방문하는 기당미술관이다. 내가 흐린 날에 미술관을 방문하는 '까닭'은 바로 실내이기 때문이다. '제주에서 맑은 날 실내에 있는 것은 죄악이다'라는 제주살이의 새로운 죄를 지정하였다. 물론 흐린 날도 비 오는 날도 좋은 제주지만, 제주 자연의 반짝거림은 맑은 날이 제격이기 때문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제주 날씨는 예상하기 어려워 미리 미술관을 사전 예약하기 어려운 점도 있지만, 기당 미술관은 갈 때마다 혼자 관람하게 되는 미술관이라 사전 예약은 크게 필요 없는 듯하다. 미술관 특유의 차분하면서 마음이 채워지는 분위기를 고요하게 혼자 즐기는 맛은 해본 사람만 아는 행복이다. 


변시지 화백의 작품은 바뀐 것이 없다. 이번에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것은 바로 ⌜날씨의 까닭⌟ 전시이다. 왔다 갔다 하는 제주 여름 날씨에 찰떡 쿵떡인 전시이고, 2021년 7월 30일부터 9월 12일까지 진행하고 있다. 



구름이 만들어내는 하늘



제주도립미술관 ⌜탐나는 봄⌟ 에서 처음 알게 된 강운 작가의 구름 작품이 전시의 시작을 연다. 이번엔 그림 작품이다. 그때 본 한지로 만든 구름 작품이 정말 좋았는데, 살짝 아쉽다. 구름은 단순히 "대기 중의 수증기가 상공에서 응결하거나 승화하여 매우 작은 물방울이나 얼음의 결정으로 변한 것"일뿐인데 우리에게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하고, 감탄사를 토하게 하기도 하면서, 어딘가 그리움을 느끼게 할 때도 있다. 고층 건물이 없는 제주에선 하늘을 보기가 쉽다. 서울에서 처럼 하늘을 보려고 하면 고층 건물로 조각 조각나버린 하늘이 아니라 바야흐로 넓게 펼쳐지며 바다와 짝을 이루는 하늘을 맘껏 볼 수 있다. 이런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라면 뭔가 빠진 듯하다. 하늘 풍경을 완성시켜주는 것은 바로 구름이다. 영국에는 '구름감상협회'가 있다. 구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들의 구름 관찰담을 나눈다. 이곳의 선언문에는 "우리는 파란하늘주의를 만날 때마다 맞서 싸울 것을 맹세한다. 매일 구름 하나 없는 단조로운 하늘만 올려다봐야 한다면 인생은 너무도 지루해질 것이다."라고 쓰여있다. 구름의 작가 강운 화가님도 구름감상협회 회원이신지?





강요배 화가의 <구름이 하늘에다>라는 작품은 제목이 적절했다. 제주 하늘을 감상할 때 '와! 정말 말도 안 된다'라고 감탄이라는 단어로는 모자랄 정도로 감동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그것은 바로 "구름이 하늘에다" 뭔 짓을 한 것들이었다. 살짝 보이는 낮달과 함께 토끼 모양의 구름 그리고 방귀 같은 구름이 함께 어우러진 새파란 작품은 시원하여 제주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시적인 제목이 정말 좋았다. 




그때 그 제주 풍경


황토색의 변시지 화백의 메인 색깔이 아닌 다른 색이 섞인 작품 두 점이 있었다. 1978년 작 <제주> 그리고 1977년 작 <서귀포>라는 간결한 제목의 그림들이다. 



저곳은 돔베낭길이 아닌가? 범섬이 살짝 뒤에 있는 풍경은 현재 새섬공원 쪽에서 바라보면 바로 이 풍경이 보인다. 


70년대에도 초가집과 말 그리고 작은 배가 있는 제주 바다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황토색보다는 푸른색이 메인으로 보이는 그림은 가본 적 없지만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따뜻한 느낌을 준다. 


고보형 작가의 성산에서 보는 <우도가 보이는 풍경>은 내가 푹 빠졌던 풍경이라 그런지 우도를 바라보던 그때의 하늘과 냄새, 분위기, 소리까지 떠올리게 하는 마법의 그림이다. 더해서 그림 속의 우도에 들어가서 우도에서의 고요했던 이른 아침 하고수동 해수욕장에서의 행복했던 순간까지 느끼게 해주는 마치 해리포터 사진 같은 그림이었다. 겨울에 눈 쌓인 성산에서 바라보는 우도는 이런 모습일 것이다. 구름도, 하늘도 여름이 아니라 겨울임을 느끼게 해 준다. 




김준권 작가의 <성산일출봉>은 나를 미치게 만드는 류의 작품이다. 현실 풍경이라 '실경산수'라고 부를 수 있으면서도 약간 변형되어 판타지적인 느낌을 주는 류의 작품들. 거기다가 살짝 한국 풍이 섞여 있으면 나는 무조건 넉다운된다. 이런 류의 작품들을 일컫는 이름이 있을 것도 같지만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소위 '뻑가는' 류의 작품들이라 보면 가슴이 먼저 반응한다. 광치기 해변에서 바라보는 성산일출봉의 모습이다. 목판화가 김준권 화백은 나만 몰랐지 이미 유명한 분이셨다. 우리나라는 팔만대장경으로 대표될 정도로 목판의 역사가 깊은데 단절된 듯한 목판의 전통을 잇고 계신 분이다. 




박능생 작가의 <주상절리에서 점프하다>는 색감과 분위기가 독특했다. 한국화가인 박능생 작가는 전통적 산수화의 느낌과 함께 현대의 모습을 담아내는 분이다. 생생한 번지점프의 모습에 함께 스릴이 느껴지는 다감각적인 작품이었다. 




내가 경험한 제주 여름 날씨


제주의 날씨는 변화무쌍하다. 특히, 여름엔 더욱 그런 듯 싶다. 5월에는 항상 맑았다. 그리고 희끄무리한 수증기도 공기 중에 없었다. 지금은 너무나 익숙해서 없으면 이상한 원경을 흐릿하게 만드는 그 수증기들 말이다.

5월의 어느 날


하지만 여름의 서귀포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나기도 많이 만났고, 그런 소나기 직전에 마른하늘의 날벼락도 보았다. 쨍! 하게 맑은 날 운전해서 가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에서 번쩍하는 광경. 

"내가 방금 뭘 본거지?"

바로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다. 곧 이어서 미친듯한 소나기가 쏟아졌고, 좀 더 서쪽으로 가자 국지적으로 내렸던 소나기를 피할 수 있었다. 


또 한 번은 올레길을 걸은 날이었다. 내내 우르르릉, 우르르릉 하는 잔 천둥과 자잘 자잘한 비와 함께 했던 올레길이었는데, 올레길 걷기를 끝내자마자 또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다. 내가 올레길을 걷는 동안은 간만 보다가 끝내자마자 쏟아지는 말도 안 되는 소나기였다. 내가 끝나갈 때쯤 역방향으로 올라가는 올레꾼 한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괜찮으실까 걱정될 정도의 비였다. 올레길을 걷고 나서 이런저런 계획이 있었는데, 

'아냐, 이렇게 비가 오는걸. 그냥 집으로 들어가자.'

하고 이른 귀가를 결정했다. 그렇게 운전을 하고 가는데 이게 웬 걸. 룸미러 너머의 하늘은 새파란 하늘색을 보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동쪽이 아닌 서쪽으로 차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파란 하늘이 기다리고 있었고, 와이퍼 닦는 속도를 못 따라가던 소나기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른 귀가를 막는 맑은 날씨. 이런 날에는 역시 야외에서 놀아야지. 


계속 우르릉 우르릉 대는 제주 하늘


이렇게 소나기가 왔던 날 서쪽으로 넘어가 산방산과 단산을 낀 무지개를 볼 수 있었다. 


8월 어느 주말에 제주에 놀러 오기로 한 친구는 

"주말에 비가 온대. 이런저런 액티비티 하고 싶은데. 어떡하지? 갔는 데 아무것도 못하면 어떡해. "

라고 고민하며 내려오지 않았지만, 말도 안 되게 맑은 날씨를 보여줬던 토요일을 가졌던 날도 있었다. 예보는 예보일 뿐, '지금'의 날씨는 오직 '지금'만 알 수 있는 제주였다. 



이런 변화무쌍한 날씨와 함께 했던 제주 사람들은 자연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자연의 변화인 날씨는 현대 사회보다 그 시절 훨씬 더 중요한 요소였다. 해녀들은 파도가 심하면 물질을 못한다. 홍수가 나면 농사는 망친다. 마른하늘의 날벼락을 봤을 때 옛사람들은 분명 나쁜 징조로 여겼을 것이다.


제주에 있으면서 날씨를 거스르려는 노력을 많이 했다. 태풍이 온다 해도 바다에 들어가고, 비가 와도 오름에 올라가는 등 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자연이 어느 정도 허락해 줬기 때문이다. 비가 너무 많이 오면 계곡이 넘쳐 위험해지기 때문에 한라산 둘레길엔 들어갈 수 없었고, 파도가 너무 심하면 애초에 해안에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제주지방기상청 사이트에 들어가 날씨가 좋기를 기대하던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쨍하게 맑은 날씨를 보여주면 기다림 때문에 설렘과 행복은 훨씬 증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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