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성 안에는 세대를 거슬러 모든 여성들의 경험이 차곡차곡 쌓인다
수원 동탄아트스페이스에서 2021년 9월 1일부터 10월 13일까지 열렸던 윤석남 작가 개인전 <내가 되는 그림> 전. 윤석남 작가의 팬이 된 후로 윤석남 세 글자가 보이면 탐하고 있는 와중에 개인전에다가 수원 정도면 충분히 다녀올 만한 거리였다. 코로나로 인해 문화센터를 휑했고, 출입구를 전부 막아 놓아 한참을 헤맸지만 오길 잘했다 싶었던 전시였다.
학고재 갤러리에서 윤석남 작가의 최근 작품만 보았고, 과거 작품은 사진으로만 봤기 때문에 보고 싶었다. 이번 전시에는 윤석남 작가의 초기작부터 지금 작업하시는 여성 독립운동가 초상까지 두루 전시하고 있었다.
<우리는 모계 가족>이라는 같은 제목을 가진 그림과 설치작품이 가장 먼저 눈길이 간다. 딱히 열심히 분석하려 하지 않아도 부계 사회, 가부장제를 비판하려는 의도가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비슷한 코와 입매를 가진 3대의 마치 가족사진과 같은 작품이다. 회화에선 강렬한 카리스마가 많이 느껴지는 반면 설치 작품에선 재료인 나무 특유의 부드러운 느낌과 얼굴 느낌도 좀 더 부드럽고 단순해졌다. 윤석남 작가의 평면작품도 좋지만 조각 설치작품들이 주는 입체감이 좋다. '여성'이라는 카테고리만으로 환원되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여성'을 벗어날 수 없는 정체성. 이건 비단 여성들 뿐만 아니라 모든 개체들에게 적용된다. 단 하나의 얼굴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모두 입체적이다.
학고재 갤러리 <싸우는 여자들:역사가 되다> 전시에선 못 봤던 오광심과 김향화 초상이 있었다. 종이에 연필로 그린 거랑 채색된 거랑 느낌이 다른데, 유독 오광심 독립운동가의 초상에서 차이가 크게 느껴졌다. 채색도 좋은데, 연필이 주는 강렬하면서 묵직한 느낌이 좋다.
<여기도 불꽃이 있나요?> 정돈되지 않은 거친 나뭇결이 남아있는 가운데 어찌 보면 단순한 눈코입 그리고 손인데 할 말을 가득 담고 있어 보인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한 듯 바로 옆 작품 <이 소리 들리나요?> 에선 손을 모아 외치고 있다.
2004년 작 <기도>에서 팔이 늘어난 모티브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여성들이 손을 맞잡는 연대를 상징한다. 손을 대신하여 연꽃 봉오리가 있다. 꽃봉오리는 아직 만개하지 않은, 만개하지 못한 여성들의 연대를 보여주는 듯하다. 연약한 꽃봉오리지만 희망적이다. 연꽃의 꽃말은 ‘순결과 청순한 마음’이다.
<어머니 I-열아홉 살>은 1993년 두 번째 개인전이자 미국을 다녀오고 연 첫 개인전 '어머니의 눈'에 선보인 어머니 작품이다. 열아홉 살의 어머니는 순수하지만 강한 눈빛을 가지셨고, 마냥 '소녀소녀'하지 않다. 눈빛에서 뿐만 아니라 조각조각을 이어 붙인 형식 자체에서도 느껴지는 강인함이 있다. 모성이라는 것이 마냥 희생의 아이콘은 아니라는 게 느껴진다. 윤석남 작가는 어머니를 주제로 한 작업을 왕성하게 하시는데 이건 일종의 의식처럼 보인다. 모든 딸은 내 속에 어머니를 담고 있다. 딸이 하나의 개체가 되기 위해선 어머니와의 관계 정립이 필요한데 윤석남 작가의 어머니를 모티프로 한 작품들이 그 과정인 듯하다.
나무 조각 작품이 중간에 있는 줄 모르고 벽을 보고 들어가다가 바리공주와 눈이 마주치고 깜짝 놀랐다. 예쁜 자개로 장식한 저고리와 기다란 비단 치마를 입은 바리데기이자 무당이다. 벽은 한지 수공예 작품으로 푸른 생명수를 의미한다. <블루룸>은 1996년 <핑크룸>으로 시작한 윤석남 화백의 룸 연작 중 하나이다. <핑크룸>이 가정을 찢고 나오는 여성을 형상화했다면, 2021년 학고재 갤러리에서의 <레드룸>은 여성 독립운동가를 추모하는 공간이었다. 2018년 <블루룸>은 바리데기 설화를 담아 아버지의 계보를 거부하고 주체적으로 무속인의 삶을 선택하는 여성을 표현한다.
이즈음 해서 윤석남 작가를 찾아간 곳이 덕수궁이었다. DNA전도 정말 좋았지만, 상상의 정원도 참 좋았던 덕수궁. 지난 2021년 11월 말까지 진행된 <덕수궁 프로젝트 2021:상상의 정원> 설치 작품으로 윤석남 작가의 <눈물이 비처럼, 빛처럼:1930년대 어느 봄날> 이 있었다. 덕수궁 밖의 현대식 빌딩, 근대식 건물 석조전과 덕수궁 정전인 중화전을 배경으로 둔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여성들이 있다. 이들은 조선시대 궁이라는 남성이 지배하는 공간에 당연하게 들어와 있다.
윤석남 작가의 작품이 좋은 이유는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면서 페미니즘을 전투적인 방식으로 표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통해 솔직하면서도 따뜻하게 끄집어낸다. 서정성이 담겨 있어 부드럽고 그렇기에 더 강하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나는 누구인가. 그림을 그려야겠다." 하고 마흔 줄에 들어서서 '갑자기' 미술을 시작하신 윤석남 화백. 나를 찾기 위해, 나를 표현하기 위해, 나를 드러내기 위한 억눌렸던 욕구가 스프링처럼 튀어나오듯 작품 활동을 하고 계신다. 윤석남 작가를 존경하고 또 계속 응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