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

2차 세계대전 동부전선 소녀병사들의 기억들

by 정여해


# 한줄 추천평 : ★★★★★ 전쟁 속의 여성이라고 하면 남성들의 지킴을 당해야 하는, 또는 남성들에게 무참히 짓밟히는 모습이 떠오르는데, 총칼이 오가는 전투 현장을 만들어내기 위해 있었던 여성들의 전쟁에 대한 증언을 생생히 들을 수 있다.



# 읽기 쉬운 정도 : ★★★★★ 읽기 쉽다. 할머니가 전쟁 이야기 해주는 것을 듣는 느낌이다.












전쟁은 여전히 인간사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비밀 중 하나로 남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거대한 역사를 인간이 가닿을 수 있는 작은 역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2015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유명해진 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 겸 저술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Svetlana Alexievich의 저작이다. 긴 제목의 이 책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1941년부터 1945년 까지 동부전선 (독일 vs 소련) 에서의 러시아 소녀 병사들의 전쟁에 대한 기록, 목소리를 기록한 책이다. 저자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대부분의 지면은 할머니들의 회상, 그들의 기억과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저널리즘의 형식을 뛰어넘어 목소리 소설 (소설-코러스) 라고 불리는 새로운 문학 장르를 개척했다고 평가받는다.

"이들은 이미 두 사람이다. 저 사람이면서 이 사람이다. 젋은이면서 늙은이다. 전쟁터에 있는 사람이면서 전쟁 후의 사람이다. 오래전에 전쟁이 끝난 사람. 나는 늘 내가 동시에 두 목소리를 듣는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p.256)

전쟁 관련 책을 좋아하고, 1차 대전이니, 2차 대전이니 전쟁의 역사를 공부하고, 밴드 오브 브라더스, 라이언 일병구하기, 진주만, 킹덤 오브 헤븐, 엘 시드 등 고대, 중세, 현대 가릴 것 없이 전쟁영화는 빠뜨리지 않고 보는 내게 '여자들의 전쟁' 에 대해 한 번도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반쪽 자리 전쟁만을 알고 있던 나를 '퍽’ 하고 때려서 일깨워준 책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역사만 떠올려 봐도 일제의 만행, 1965년 한일협정, 수요시위, 정대협 등에 관한 내용만 떠오른다. 나도 모르게 전쟁의 중심에 '남성' 을 가져다 놓고, 그 주변부에 '여성'을 배치해 놓았던 것을 깨달았다. 전쟁에 대한 관념적 이미지를 '남성' 이라고 못 박아 둔 것이다. 영화 <고지전> 에 그려졌던 여성 저격수 '3초' 그리고 영화 <암살> 의 독립군 여성 저격수 역시 떠올랐다. 이들을 지칭할 때 내가 '여성' 이라는 말을 앞에 붙여야 사람들이 아~ 하고 드디어 그 사람을 떠올릴 수 있는 것도 '남자들의 전쟁' 에 익숙한 탓이리라.

전쟁으로 인한 인간성의 파괴 라는 주제는 대부분의 전쟁을 주제로 한 영화나 소설에서 그려지지만, 전쟁에서 잃은 '소녀성, 여성성' 은 낯선 주제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이것을 주제로 글을 쓰기로 마음 먹은 작가의 의도에 노벨상을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쟁터라는 '남자'들의 일상 속에서, 전쟁터라는 '남자' 들의 임무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도 들려주었다. 스스로의 본성을 변질시키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p.338)

"여자들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이고, 또 여자들은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여자'의 전쟁에는 여자만의 색깔과 냄새, 여자만의 해석과 여자만이 느끼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여자만의 언어가 있다. 그곳엔 영웅도, 허무맹랑한 무용담도 없으며, 다만 사람들, 때론 비인간적인 짓을 저지르고 때론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만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땅도 새도 나무도 고통을 당한다.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고통스러워한다. 이들은 말도 없이 더 큰 고통을 겪는다." (p.18)

"전쟁에 대한 여자의 기억은 감정의 긴장도나 고통의 지수로 볼 때 그 집광력이 가장 높다." (p.28)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쓰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건 모두 남자들이 남자들의 목소리를 들려준 것이다."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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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들의 전쟁 한복판에서의 역할은 정말이지 다양했다. 조종사, 군의관, 위생사관, 저격수, 통신병, 기마병, 보병, 간호병, 항공기 정비사, 운전병, 정찰병, 포병, 지하공작원, 빨치산 병사, 이발병, 세탁병, 제빵병, 기록병,건설병, 물품보급병,우편병 등등.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전쟁에서의 모든 역할에 모두 속'할 수' 있었고, 속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전쟁터에서 동료로서, 전우로서 함께 싸우던 '남성' 병사들은 전쟁 이후 '여성' 병사들을 내쳤다.

"우리는 애를 참 많이 썼어...... '여자들이 그렇지 뭐!'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그리고 우리가 남자들 못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남자들보다 더 많이 노력해야 했어. 하지만 남자병사들은 오랫동안 우리를 깔봤고 아주 거만하게 굴었어. '여자들이 무슨 전쟁을 한다고......' 라는 식이었어." (p.357)

"남자들은 전장에 다녀왔기 때문에 승리자요, 영웅이요, 누군가의 약혼자였지만, 우리는 다른 시선을 받아야했지. 완전히 다른 시선...... 당신한테 말하는데, 우리는 승리를 빼아겼어. 우리의 승리를 평범한 여자의 행복과 조금씩 맞바꾸며 살아야 했다고. 남자들은 승리를 우리와 나누지 않았어. 분하고 억울했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 (p.223)

"과거는 사라졌다. (중략) 사람은 남았다. 평범한 보통의 삶 한가운데 사람만 남은 것이다. 자신의 기억 외에는 주위의 모든 것이 평범하다. 나 역시 목격자가 되어간다." (p.255)




대부분의 할머니들은

그 땐 뭣도 모르고 순수했지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4년을 보냈지
전쟁에서의 괴로운 기억들을 묻기 위해, 잊기 위해 노력했어
하지만 지금도 생생하고 너무나 괴로워.
지금이라도 토로할 수 있어서 고마워.

의 플랏을 따라간다. 하지만 이 책의 줄거리를 이렇게 정리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할머니들의 절절한 사연과 그녀들의 목소리, 말투를 따라 읽다보면 저절로 반전과 평화를 마음 깊이 외치게 된다. 마침 이 책을 읽던 날이 프랑스 파리에서 대규모 민간인 대상 테러가 일어나 120 여명의 사망자가 생긴 날이자, 광화문 태평로의 민중 시위가 들기름 바른 경찰 차벽에 둘러싸여 물대포로 공격받은 날이었다. 약한 정도의 폭력에 노출되며 그것에 익숙해지면, 더욱 더 잔인하고 파괴적인 폭력을 행하기는 더욱 쉬어지기에 무서운 밤이었다.

내가 존경하는 정희진 님의 추천의 글이 책 가장 뒷편에 있다.


통념과 달리 여성은 남성의 보호를 받는 존재가 아니라 인류의 수호자다. 만일 '노벨 평화문학상' 이 있다면 이 책은 최초의 수상작이 될 것이다.
- 정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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