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의 감옥생활을 빼면 스물셋 일뿐
1914년 함경도 명천군 출생. 1928년 가족 모두 서울로 이사 온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31년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퇴학당하고, 이후 공장에 취직하여 노동운동에 헌신한다. 박진홍은 총 4번의 감옥 생활을 하는데, 그 첫 번째가 1931년 12월 '경성 학생 RS 협의회'이다. 두 번째는 1934년 초 경성 트로이카 지하 혁명 조직원 활동으로 검거, 1935년 1월 용산적색노조사건으로 징역을 산다. 1937년 7월 조선공산당 재건 경성준비그룹 활동으로 재검거된다. 1939년 경성콤그룹에 관여하다가 다시 감옥에 들어가고, 1944년 10월 출옥하였다.
1944년 11월 김태준과 함께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을 찾아 연안으로 갔고, 곧 해방되어 11월 서울에 도착한 후 조선노동당 활동을 하였다. 조선부녀총동맹에 참가하여 문교부장 겸 서울지부 위원장을 지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에 참여한다. 이후 월북하여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고, 사법재판소 판사를 맡는다. 이후 행적은 없으나 북한에서 아들과 딸이 반혁명 분자의 자식으로 낙인찍혀 큰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총 4회의 투옥, 총 10년의 세월이다. 박진홍 지사의 삶의 일대기를 보고 누가 독립운동에 '부차적이고, 보조적인 역할'을 했다고 깎아내릴 수 있으랴. 여성들이 실제 독립운동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여성들이 했다면 그것은 일단 '사소한 일' 일 것이라는 편견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박진홍 지사의 삶을 보면 임신과 출산을 항일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겪는다.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감옥이나 산길 이동 중에 임신과 출산이라니.
박진홍 지사는 단지 이재유의 부인, 김태준의 부인이 아니다. 그들은 박진홍의 집사람이다. 1946년 11월 15일 자 < 독립신보 >에 실린 박진홍의 인터뷰 글이다.
“가정은 민주주의적이긴 합니다. 서로 다 혁명운동에 이해가 있지요. 그러나 집사람도 봉건의식이 조금은 남아 있어요. 내가 무얼 쓰면 여자가 그런 걸 다 쓴다고 적이 신기하게 여겨요. 호호호. 우리 부녀운동이 물론 봉건 도덕에 얽매여 버리는 극우적인 현상도 잘못이지마는 너무 가정을 경멸 파괴하고 남편을 투쟁 대상으로 삼는 것은 극좌적인 오류예요. 현 계단에 있어서는 부부가 단결해서 혁명의 기초가 되어야 할 줄 압니다.”
출처 :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 안재성
1930년대 항일운동은 사회주의 노선이 지배했다. 그렇기에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1930년 항일운동은 거의 없는 것으로 취급한다. 고작해야 이름만 '정부'를 달았지 가난한 망명 집단이나 다름없었던 임시정부에 집착한다. 그분들의 숭고한 정신에 침을 뱉으려는 것이 아니다. 이념과 사상으로 갈라치고, 있었던 일을 묻어버리고 하는 작업을 멈추어 보자. 그분들의 신념과 행동은 존경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궁극적인 사회주의 국가의 모습이야 어찌 됐든 간에 핍박받는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가졌던 사람들이다. 박진홍 투사의 절친이었던 이효정 독립운동가는 해방 후 남한에 남았고, 그들과의 친분으로 평생을 가족들에게 죄인이었어야 했다. 2006년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았다. 2010년 돌아가셨는데, 그전에 서훈을 받으실 수 있었던 것이 참 다행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검색하다 알게 된 안재성 소설가의 < 경성 트로이카 >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
그리고 뉴트의 기사가 가장 상세하고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