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타살? 조선의 잔다르크
"열아홉 살 때부터 오늘까지 이십일 년 간의 나의 투쟁이란 나 혼자로선 눈물겨운 적도 있습니다마는 결국 돌아보면 아무 얻은 것 하나 없이 빈약하기 짝이 없는 기억뿐입니다"
1907년 경남 마산 (현 창원시) 출생. 가족들도 독립운동가였다. 가난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사회주의 노선을 밟았다. 모스크바 공산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사회주의 운동을 위해 1927년 6월 상하이로 파견된다. 코민테른 즉,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국제공산당으로 각 나라에 하나의 공산당을 지부로 두었다. 김명시의 임무는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 사상의 조선인들을 중국 공산당에 가입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국민당 정부에 의한 탄압이 심했고, 사회주의자들의 봉기가 활발했다. 조선에서는 일제가 조선공산당을 철저히 탄압하고 있었다.
1930년 5월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만주에서 큰 봉기를 일으킨다. '제4차 간도 공산당 사건 '또는 ‘간도 5·30 사건’이라 불린다. 김명시는 무장대 300명을 이끌고 하얼빈 일본영사관을 공격하였다. 일제의 반격이 있었지만, 김명시는 일본의 체포를 피해 상하이로 귀환한다.
김명시는 1932년 3월 인천지역 여성노동자 조직을 위해 국내로 잠입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앞장서다 동지 독고전의 배신에 의해 체포되어 추위로 악명 높은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1939년 만기 출소한다. 이후 화북지역 조선의용군 부대를 찾아가 여성 부대 지휘관으로 활약한다. 해방 후 서울로 돌아왔고, 당시의 인터뷰 기사에 '조선의 잔다르크', '백마 탄 여장군'으로 대서특필 되고, 사람들은 김명시 장군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서울에서 김형선, 박헌영과 함께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하고 1946년 11월 남조선노동당 창당에 참여한다.
그리고 1949년 10월 모일 부평 경찰서 유치장에서 옷으로 목을 메 자살했다는 기사가 나오는 것으로 김명시의 역사는 끝이 난다. 김명시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국가보안법은 일제의 치안유지법에 기반한 법으로 1948년 제정되었다. “국헌을 위배하여 정부를 참칭 하거나 그에 부수하여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구성한 자는 죄에 의하여 처벌”한다는 내용이다.
미군정과 우익 정부에서 반공정책으로 좌익 정치 세력들을 거세게 탄압할 때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대적인 좌익 숙청이 일어났고, 김명시가 '국가 보안'을 위협하는 인물로 체포된 것이다.
김명시 장군이 실제로 자살한 것인지, 타살인데 자살로 위장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사망한 날 조차도 정확하지 않다. 대단한 정신력과 의지로 항일 무장투쟁에 참가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자살 따윈 하지 않았을 거야 라는 어리석은 생각이 앞서는 것은 그렇게 돌아가신 것이 슬프기 때문이다. 자살이라는 선택을 하셨단 것을 '김명시 장군 답지 않다'라고 볼 수 있을까. 그렇게 염원하던 해방된 조국 땅에서 왜 조국의 명령으로 또다시 갇혀야만 했던 마음은 감히 섣부르게 판단할 수 없다. 추위로 악명 높다는 신의주 형무소에 일본에 의해 구금되는 것이 도리어 더 행복한 것이었을까. 김명시 장군의 사인이 타살이든 자살이든 우리는 또 위인을 이념 갈등으로 잃었다.
2019년 김명시의 친척들이 모이는 행사 유튜브가 있다. https://youtu.be/s8xOT1Y6Fjc 최고로 멋지고 자랑스러운 백마 탄 장군 김명시의 친척이면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였다는 이유로 남한에서 괴로움을 겪었던 유족들의 담담한 증언이 씁쓸하다. 2019년 1월 열린사회희맹연대는 김명시 장군의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서'를 국가보훈처에 제출했으나 '사망 경위 등 광복 후 행적 불분명'로 거절당했다. 복한 정부 수립에 기여한 것으로 판단되어 서훈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김명시 장군에 관한 글은 역사적 사건과 함께 잘 버무려낸 한겨레 기사가 가장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