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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여해 Apr 07. 2021

시험과 공부

에스프레소 샷 7개 아메리카노

 학위를 따는 데 4년이 걸린다고 하면 긴 시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눈 깜빡할 새 지나간다. 그중에 1년이 해부학으로 점철되는 1학년이었다면, 또 다른 1년은 임상과목으로 가득 채워지는 시간이다. 


최고의 우등생, 완벽주의자, 학교 대표와 운동부 주장,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 항상 최고였고 상과 메달을 받았고 남들이 박수치고 알아봐 주는, 눈에 띄는 존재로 지내는 데 이골이 난 아이들을 선별해 똑같은 300명과 한 방에 모아놓으면 결국에는 모두 평준화되기 마련이다.’ - 입학 담당관, 「 나는 마음이 아픈 의사입니다 」 발췌




 경쟁을 뚫고 들어온 의전원에는 첫 시험 전에 팽팽한 실처럼 긴장감이 공기를 날카롭게 했다. 의대에서 성적은 정체성이자 자존감이다.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중요하지 않은 것들 이건만 그 안에 있으면 나의 모든 것이 되어 버린다. 여름 방학, 겨울 방학을 통틀어 1달 정도이다. 그래서 11개월 동안 시험은 매주 한 번 꼴로 있는 셈이다. 즉, 시험이나 성적에 연연하지 않는 학생이라고 하더라도 물리적으로 시험이 나의 인생을 꽉 채우고 있다. 시험공부, 시험, 성적, 시험공부, 시험, 성적의 반복이기 때문에 시험과 성적으로 가득 찬 '인생' 속에서 성적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서 자아를 바라보는 시선을 찾기는 쉽지 않다. 어차피 유급만 하지 않고 시간만 보내면 의사가 될 것이기에 어떤 이들은 '유급만 면하자'의 스탠스를 취하기도 한다. 하지만 등수가 나올 때 낮게 나오면 속 상하는 것은 모두 동일하다. 


 표 안에 숫자로 결정되는 인생을 보내다 보면, 그 숫자를 만들어 내기 위한 과정에서 균열이 발생한다. 

"쟤는 스터디에서 틀린 답을 알려주고 자기만 맞는 답을 알고 있었대."

"쟤는 연막충이야. 밤새 공부했으면서 하나도 안 했다고 징징거려."

"쟤는 아는 선배한테 족보를 미리 받아서 다 봤대."

 모든 대화와 주제가 그 숫자로 점철된다. 우리는 서로가 경쟁자였다. 교수님들이 아무리 '너네 어차피 다른 과 가고, 그때 가면 내가 모르는 거 동기한테 물어보고, 그렇게 살 거야. 왜 이렇게 서로를 미워하면서 경쟁하니'라고 설득해도, 등수가 뇌를 지배해 버린 학생들에게는 튕겨져 나올 말들이었다. 


 내가 있던 곳은 성적을 암호를 통해 공개했다. 누군가는 잔인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성적을 '관리'해야 하는 학생의 입장이나 또 다른 측면에서 성적을 '관리' 해야 하는 행정 교직원의 입장에서도 효율적인 방식이다. 처음엔 암호지만, 결국엔 다 드러나기 마련인 투명한 암호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우리는 학기 말이 되어 갈수록 항상 저공비행을 하던 동기들을 유급으로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된다. 




 생물이나 화학과 같은 기초 과목들은 고등학교 과목들의 심화 버전으로 어느 정도 익숙하지만, 임상 과목은 다르다. 기초 과목은 소위 해부학, 생리학, 생화학과 같은 생명과학대학이나 간호대학에도 있을 법한 과목이라면 임상 과목은 의과대학에만 있을 법한 과목들이다. '순환기학', '호흡기학', '소화기학', '근골격계학' 이런 이름들을 가지고 있고, 학교가 아닌 병원에 소속된 진짜(?) 의사 교수가 와서 가르치는 과목이다. 


 기초 의학과 임상 의학은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고, “기초” 이기 때문에 먼저 배우고 그다음에 임상 과목을 배워야 할 것 같지만, 사실은 아예 별개의 학문으로써 선후 관계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임상과 수업을 듣게 되면 굉장히 낯설다는 느낌을 받는다. 기초 과목을 겪으며 마구 쏟아지는 수업과 시험에 익숙해졌다고 자신했지만, 또다시 낯설고 적응이 필요해진다. 기초와 임상 사이를 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애초에 평행선을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순환기학의 충격


 나는 순환기학을 처음 임상 과목으로 접했는데, 첫 수업 symptoms & signs에서 너무나 당황했다! MR, TR, CAD 지금은 너무나 익숙한 약어지만 그때는 처음 들어보는 용어와 약어들이었다. 교수님은 몇십 년 동안 맨날 쓰는 용어라서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수업을 하시는데, 엄청나게 낯설고 모르는 약어들의 쏟아짐이라고 복습을 하며 좌절했던 일기가 남아 있다. 




 그렇게 1년을 보내면 병원에서 일어나는 모든 과목을 배운 것이 된다. 병원에는 수많은 과가 있는데, 그 과에 대한 내용을 1년 안에 머릿속에 욱여넣는 것이다. 당연히 넣어지지는 않고, 넣으면 튀어나오고 넣으면 튀어나와서 실습을 할 때면 여전히 하얀 상태인 것은 똑같다. 다만 넣느라 1년 동안 쎄가 빠졌고, 커피 값이 그만큼 들었으며, 수명을 그만큼 더 갉아먹었을 뿐. 너무 많은 지식의 방대함에 허덕였지만, 나는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아이러니하다. 너무 많이 외웠기 때문에 외운 건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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