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김창열 미술관
호림미술관에서 알게 된 김창열 화백의 미술관이 제주에 있다 하여 이번 제주 살이에서 꼭 가야 할 곳이 되었다. 「 공명, 자연이 주는 울림 」 전에서 나는 처음으로 김창열 화백의 작품을 만나 보았다. 그곳에 김화백 작품은 단 하나뿐이었지만 인상 깊었다.
물방울은 일시적인 것이다. 위에서부터 중력에 따라 흘러내리는 듯한 물방울을 보면서 흔적을 남기고 흘러내린 물방울은 그 전의 물방울과 같은 물방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는 의문이 생겼다. 종이는 물을 끌어당겨 물방울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래서 증발해 버리는 물은 종이의 성질을 조금이라도 머금고 떠나는 것 같다. 그래서 물방울을 만나기 전의 종이와 후의 종이는 다른 종이가 되어버릴 것만 같은 느낌. 그렇게 물방울은 잠깐 머물고 사라져 버리는 일시적인 것이지만, 종이를 변화시키기엔 충분하였다. 그렇게 물방울이 떠나버려도 변화된 종이가 영원하다면 물방울도 영원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 공명, 자연이 주는 울림 」 전에서 김창열 화백의 그림을 보고 느꼈던 감상이다. 이렇게 물방울 뒤의 배경의 변화에 주목했던 나는 이번 관람에서 배경이 다양한 김 화백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 김창열 화백은 배경을 변화시키는 실험을 계속하였다. 목판, 흑연 등 재료 자체에 변화를 주기도 하였고 얼룩이나 한자를 깔기도 한다. 이렇게 어릴 때 할아버지께 배웠던 천자문을 배경으로 한 물방울 작품들은 <회귀> 시리즈이고, 이를 정한 것은 회갑이 지나면서부터라고 한다. 60년 전에 떠났던 물방울이 다시 돌아온 것일까. 김창열 화백은 회화를 넘어서 설치 작품까지도 선보인다. 제주 미술관에 <의식 >, <회귀>, <삼신>, <물의 나라 이야기> 작품들을 볼 수 있다.
김창열이 최초로 작업한 물방울 작품 < 밤에 일어난 일 >을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다.
작품을 관람하면서 ‘왜 하필 물방울일까?’ 하는 질문이 계속 들었다. 앞서 언급했듯 물방울은 흐르는 물이 영원히 흐르는 자연을 상징하는 것과 달리 일시적이다. 김창열 화백은 물방울에서 동양적 순환 원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완벽한 겸허와 무한한 가능성이 동시에 교차하는 것이다. 나는 이 원형의 액체를 캔버스에 재현시키며 우주적 공과 허의 세계를 파고든다. 너무 흔해서 무심코 지나치는 물방울이지만 거기에는 삼라만상의 이치가 투영되어 있다. - 김창열
책이나 종이에 떨어진 물방울은 사실 아름답기보단 좀 짜증스럽다. 종이를 적시고 손상시키며 글자를 번지게 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즉, 종이와 물방울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만남이다. 그런데 김창열 화백은 그런 만남을 ‘영원한 것’으로 그림 속에 박제해버렸다. 그런 ‘잘못된 만남’ 속에서 종이 위에 그려진 물방울은 훼손의 가능성의 물방울이 아니라 빛을 반사하며 보석처럼 영롱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즉, 종이는 자기가 견뎌낼 수 없는 불편함을 참는다. 일시적으로 견뎌내면 영구적으로 변화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 성찰에 대한 나의 해석으로 김창열 화백의 전시가 프랑스 파리에서 열렸을 때 미술 평론가인 알랭 보스케의 말이 이해가 됐다.
인간이 그의 작품 속에서 만나는 것은 인간 그 자체가 아니라 물방울과 같은 인간이다. 바로 이점에서 그 작품은 물방울을 다시 생각하게 해 주며 동시에 인간을 다시 성찰하게 한다. 사색적 추상 속에서 물방울의 구체화된 형태 - 바로 이것을 작가가 우리에게 제시했다. - 알랭 보스케
3 전시실의 벽면 가득한 1998년 <물방울> 은 가로 5.8 미터, 세로 3.3 미터의 작품이다. 여백의 많은 다른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이 작품은 여백보다 물방울이 훨씬 많았다. 딱 보자마자 아름다움보다 징그러운 느낌이 먼저 들었다. 그러면서 갑자기 병원에서 본 환자 몸에서 나오는 진물이 떠올랐다. 고름의 진득한 느낌보다 물의 성분이 더 많은 장액들이 떠올랐다. 환자 몸에서 흘러나오는 체액이 구체적으로 어떤 환자나 어떤 부위가 기억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왜 저 작품이 나에게 고름을 떠올리게 했는지, 병원에서 봤던 누런 체액은 나의 무의식 어디에 들어있는지 궁금해진다.
2020년 12월에 발간된 < 제주 도립 김창열 미술관 소장품 > 도록은 56,000원이지만 그 값어치를 넘어선 책이었다. 많은 김 화백의 작품들을 볼 수 있고, 어떻게 전 세계를 홀렸는지 이해가 되며, 다양한 김창열 화백의 작품들을 실제로 보고 싶어 진다.
제주 도립 김창열 미술관은 2021년 3월부터 8월까지 「 빛과 그림자 」와「 물방울의 변주 」 전시를 열고 있다.
마지막으로 김창열 미술관은 매우 고요하다. 평일 낮(비록 어린이날 연휴에 낀 평일이나)에 방문하였고, 14시 사전 예약한 사람은 오직 나 한 명뿐이었다. 나를 제외한 관람객은 딱 1명이 있었고, 미술관의 위치와 분위기에 맞게 고요한 관람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입구 쪽에서 왁자지껄 소리가 들렸다. ‘아 소란스러운 관람객 무리가 들어왔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소음은 관람객이 만든 것이 아니라 직원들이 낸 것이었다. 4명 (아마도 인원 제한 때문에 5명 이상은 아닐 듯 하나 체감 소음 농도는 8명이었다)의 직원이 입구에서 매표와 체온 측정 등을 목적으로 옴닥옴닥 모여있었는데, 그들이 큰 소리로 수다를 떠는 것이 잡음의 정체였다. 작품도 좋고, 건물도 좋고, 위치도 좋고, 고요하며 새소리와 물소리가 가장 큰 소리인 곳인데 말이다. 많은 미술관을 가봤지만 대형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제외하고 이런 크기의 전시 공간에서 그렇게 크게 떠드는 직원들은 처음 봤다. 즐겁게 이야기 나누며 근무함을 고작 2,000원 낸 관람객이 제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만 좋았던 관람을 한 순간에 망친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