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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해녀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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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여해 May 15. 2021

전복 따는 일을 왜 여성이 하게 되었을까?

제주 여성 수난의 상징 : 해녀

제주 여성 수난의 상징 : 해녀

전복 따는 일을 왜 '여성'이 하게 되었을까?


기록에 따르면 조선이 중앙 집권적 지배체제가 점차 확고해짐에 따라 중앙에서 미치는 힘의 범위가 늘어나서 제주까지 닿았다. 제주도민들은 공물 진상과 노역 징발에 시달렸고, 더불어 수령의 수탈까지 있었다. 아름다운 제주는 왜나라에서도 눈독을 들여 잦은 왜구의 침범이 있었다. 올레길을 걸으며 본 환해장성이나 별방진은 왜구를 막기 위한 제주도의 노력이다. 


근데 왜 바다에서 전복을 케오는 일을 ‘여자’가 하게 됐을까? 제주도의 남자들은 무엇을 한거지? 라는 의문이 들었다. 원래 잠녀 즉, 해녀의 일은 미역을 캐는 것이었고, 포작이라는 남성들이 전복을 채취하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세금이 과중하게 부담되어 역을 피하기 위해 제주도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이를 ‘출륙도민’ 이라고 하고, 육지에서는 ‘두독야’, ‘두무악’, ‘두독야지’ 등으로 불렸다. 육지에서도 언어와 생활 풍속이 달라 차별받았고, 여전히 중앙 정부의 손아귀에 들어 있어 역을 부담해야만 했다. 결국 제주도민이 많이 줄어들어 출륙도민들을 제주도로 돌려 보내는 작업을 하다가 결국 1629년(인조 7년) 제주도민의 출륙을 금지하는 명이 떨어진다. 제주 여인은 육지인과의 혼인이 금지 되고, 여인의 출륙은 더욱 더 금지되었다. 그래서 제주 안에는 남성 보다 여성의 수가 더 많아졌다. 


떠나간 남성들의 역을 짊어 지는 일은 제주 여성들, 즉, 해녀들에게 주어졌다. 나라에 진상해야 할 전복수는 그대로인데, 전복을 끌어올릴 사람은 줄어든 셈이니 말이다. 그래서 해녀들은 미역과 함께 전복과 같은 해산물을 채취’해야만’ 하게 되었다. 제주 해녀들의 생활력은 나라에서 구조적으로 이루어진 여성 수난의 산 징표이다. 



19세기에 관에서 전복과 미역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이어 수세를 내는 방식으로 바뀌었다가 1849년 해녀에 중앙의 역이 전부 사라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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