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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여해 May 27. 2021

고독 속에서 온전한 내가 된다

< 공空의 매혹 : 고립과 고독의 연대 >@제주현대미술관

< 공空의 매혹 : 고립과 고독의 연대 > 전이 제주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21년 6월 27일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2021년 지역 네트워크 교류전으로 열리는 전시로 김시연, 박서은 작가가 참여했다. 가장 먼저 김흥수 작가의 상설 전시실을 방해할 정도로 들리는 작품이 바로 < 숲이라는 이름에 묻힌 나무 >이다. 영상과 소리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계속 반복되지만 한 비디오의 길이는 약 12분이다. 


나무인지 나무의 영혼인지 죽은 자의 영혼인지 말을 건다. ‘안녕 어떻게 지내? 말해봐. 지금 여기 왔잖아.’ 불이 다 꺼져있고 소리와 화면으로 구성된 공간에 혼자 있으면 목소리가 무섭게 들린다. 한 맺힌 영혼의 소리처럼 말이다. 물소리, 바람 소리, 파도 소리, 새소리,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벌레 소리 등 자연의 소리로 채워진 사운드에서 깜짝 놀랄 정도로 서늘하게 속삭인다. 



"

안녕 어떻게 지내. 말해봐. 여기 방금 왔잖아. 

넌 하나의 언어와 몸짓 살아있어. 하지만 한 번도 말해준 적이 없었지. 

그냥 거기에 있을 뿐. 

한 번도 말해준 적 없는 언어를 바람의 노래를 들으면서 네가 태어나고 살아지는 순간을 시간을 얘기해. 

알고 있어? 응 알고 있어. 

우리가 죽는다고 해서 세상이 없어지지는 않아

그 지점에서 나는 한없이 고독해져. 

어딘가에서 나는 너를 네가 나를 보고 있다고 알고 있어. 

알고 있어.

"


사려니 숲의 그곳에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나무의 말이라도, 억울하게 죽은 귀신의 말이라도 어울리는 대사이다. 살아있음을 탓하는 느낌이 들었다. 살아있음에도, 기억할 수 있음에도 왜 나를 잊느냐고 말이다.  


파도 소리가 들리면서 숲으로 전환될 때가 가장 신비롭다. 까만 화면에서 아래에서부터 나무가 자라 올라온다. 바로 사려니 숲이다. 사려니의 ‘살’은 신성한 곳을 의미한다고 한다. 나무가 목소리를 낼 정도이니 이 숲은 영혼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 영혼은 숲의 영혼일까, 개개 나무의 영혼일까, 아니면 이곳의 모든 죽어간 생명들의 영혼일까. 영상이 중간을 넘었을 때 검은 바탕에 하얀 작은 원으로 나무를 구성하며 아래에서 위로 쭉 올라가는데, 이것이 마치 제문과 같은 느낌을 준다.


< 숲이라는 이름에 묻힌 나무 >


고립과 고독의 연대. 개인들은 고립되어 있고 고독하다.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우리들은 이미 그랬다. 코로나로 인해 정신적인 면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부분까지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병원을 넘어서 모임이나 전시회에 참여하여 보니 공통적으로 자주 들리는 단어가 바로 ‘연대’였다. 이 곳 제주현대미술관에서도 ‘연대’를 만나다니 연대가 이 시대의 화두인가 보다. 연대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여럿이 함께 무슨 일을 하거나 함께 책임을 짐.’

‘둘째, 한 덩어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출처 : 네이버 국어사전) 


비록 몸은 떨어져 있더라도 마음만은 함께하는 연대가 바로 코로나 시대에 필요한 자세였다. 하지만 사실은 인간이 모여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자세이다. 우리는 결국 삶을 ‘함께’ 하기 때문에 함께 책임을 지는 것이 필요하다. 


< 그리고 사라지듯이 >는 정방폭포를 비디오 영상 작품으로 만들었다. 약 6분 지속되는 영상에서 


< 그리고 사라지듯이 > , < 피로 : 마라 73, 잃어버린 조각들 >


다시 들어봐도 소용없는 언어들만 들었다 날 뿐. 들었다 날 뿐. 


이라는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이 지나간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날 것 같은 말이다. 아름다운 서귀포의 정방폭포는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곳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4.3 당시에 248명의 서귀포 주민이 단기간에 학살당한 현장이다. 폭포수가 순식간에 학살의 피를 씻어냈지만, 여전히 빨간 피가 쏟아져 내리는 듯하다. 


< 피로 : 마라 73, 잃어버린 조각들 > 은 죽은 나무뿌리에 영상을 비추어 죽은 뿌리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는 느낌을 준다. 이 작품이 좋아서 한참을 보았다. 처음엔 정방폭포 영상 작품인 < 그리고 사라지듯이 >와 한 작품인 줄 알았다. 제주를 대표하는 폭포수의 물을 받고, 마라도에서 실어온 죽은 나무가 부활시키는 것으로 말이다. 별개의 작품이었지만, 충분히 하나의 작품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 피로 : 마라 73, 잃어버린 조각들 >가 좋아서 다시 계단을 거슬러 올라가 < 각자의 방식 >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마라도에서 죽은 나무뿌리를 옮기는 과정을 보여준다. 태풍에 해안으로 떠내려온 죽은 지 오래된 나무는 9년을 마라도 그 위치에 있었다고 한다. 젊은 예술가의 눈에 뜨인 나무는 마라도라는 천연 보호구역 내에 있어서 반출하는 데 법적 제약이 있었다. 또, 마라도에서 제주 본섬으로 나올 때까지 바다의 허락이 필요했다. 행정적인 제약과 날씨의 장애들을 다루는 내용들도 다큐멘터리에 들어있었다. 그렇게 긴 여정을 따라 보며, < 피로 : 마라 73, 잃어버린 조각들 >에서 나무뿌리와 기둥은 언제 부러졌을까를 궁금해하며 살펴봤는데, 나의 예상과 달리 나무는 멀리서 이동해오는 과정에서 부서진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도에 의해 잘린 거였다. ‘자르지 않을 수도 있었다’ 고 말한다. 하지만 ‘다시 부서지는 순간 깨어나라’는 메시지를 담고 톱으로 뿌리와 기둥을 분리했다. 



마라도 해안가에서 예술가에 의해 발견된 나무는 제주 본토 현대미술관 전시실에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관람객이 없어지고, 전시가 끝나고, 비디오가 꺼지면 나무는 다시 죽을 것이다. 아니, 나무는 여전히 죽어있을 뿐 우리는 나무에게 빛을 비추며 잠시나마 나무를 깨웠다고 자기 위안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은 나무는 지금 이 곳에서 살아있는 것일까? 죽은 나무가 마라도 해안가에서 바람을 맞으며 혼자 외로운 무덤을 형성하고 있었다면, 이 곳에서 북적임을 느끼며 잠시나마 외로움이 가시기를 바란다. 


영상은 나무뿌리에만 닿는다. 뒤쪽의 ‘절단된’ 기둥까지는 빛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누군가는 빛의 밝음을 받고, 누군가는 가려지고 끊어져 밝음의 혜택을 받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 같다. < 각자의 방식 >에서 바지선에, 트럭에 실려서 현대미술관으로 들어오는 나무뿌리를 바라보고 있으면 고독이 느껴진다. 수동적으로 실려오는 죽은 나무는 마라도 해안에 있을 때 완성되는 것이었을까? 인간의 손을 타서 이 곳으로 들어왔을 때 완성되는 것이었을까? 성인 대여섯 명이 붙어야 겨우 들어 올릴 수 있는 거대한 나무가 어떻게 이렇게 부서져서 죽어 있을까? 네가 살아있을 때의 모습이 궁금하다


 그 외에 많은 사진 작품들이 있고, <여행의 지도>, <여정 1> 세트의 영상 작품이 있다. 



자의든, 타의든 고립되어 마음속에서 고독이 발생할 때 나를 느낄 수 있다. 타인과 있을 때는 페르소나가 발현된다. 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그런 가면 따윈 쓰지 않아도 된다. 고독 속에서 나는 온전히 내가 된다. 수많은 개개인이 온전히 ‘내’가 된다. 그런 자아들이 연결되면 모두가 가면을 벗었기 때문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될까? 아닐 것 같다. 사람은 한 없이 이기적이지만, 한 없이 타인들과 연결되고 싶어 하는 갈증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벗겨낸 나의 속살도 나약한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있음을 발견한다. 


서늘한 느낌의 흑백 영상 작품들이 눈물 날 정도로 쓰라린 느낌을 준다. 일상 속의 예술은 현실에서 잠시 잊고 있던 감정들을 불러낸다. 박서은 작가는 수많은 개개인이 온전히 ‘내’가 될 수 있는 경험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 곳에서 그럴 수 있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전시이다. 


박서은 작가 인터뷰 : https://blog.naver.com/jmoca2007/222339809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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