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택시운전사」를 보고
나의 일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를 떠올리게 했다. 택시 운전사의 일은 누군가를 태우고 그 사람이 원하는 곳에 도착한 후에 돈을 받고 내려주면 된다. 어찌 보면 간단하고도 생각할 여지가 없는 작업 이건만 막상 실제에 들어가 보면 그렇지 않다.
내가 10살 때의 일이다. 오전 7시쯤에 집에 전화가 왔다.
"ㅇㅇ엄마. 문 앞에서 고양이가 울어요. 너무 무서워요. 좀 데려가 줘요."
우리 집 고양이가 죽은 지 얼마 안 됐을 때였고, 그 집은 아침에 출근하려고 문을 열었는데 복도에서 새끼 고양이가 울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양이를 좋아하던 우리 집에 전화해서 무서우니까 치워달라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고양이를 집에 들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고양이는 주인이 있었다. 아랫동네에 주택가가 있었는데, 그 주택에 살던 오빠 친구가 고양이의 주인이었다. 주택이기 때문에 담장을 뛰어넘어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고양이가 길을 잃고 아파트 계단까지 올라왔던 모양이다. 우리는 다시 원래 주인에게 고양이를 돌려주었다. 그렇게 공동의 아기가 되어 오빠 친구 집에 놀러 가서 보거나, 가끔 오빠 친구가 안고 우리 집에 놀러 와 함께 놀았다. 그런데 처음에 만났을 때처럼 이 자식은 집에 얌전히 붙어 있지 않고, 나돌아 다니는 스타일이었고 그러다가 사고를 당한다. 어느 날 저녁에 오빠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고양이가 트럭에 치였어."
겨우 초등학교 6학년이던 오빠 친구 아이는 피크닉 주스 박스에 고양이를 얹어서 왔다. 엄마는 예전 고양이가 예방 주사를 맞던 동물 병원에 전화를 했다. 동물 병원은 문을 닫았지만, 전화는 수의사 집으로 돌려놓은 상태였고, 그분이 나오겠다고 했다. 엄마와 나, 오빠와 오빠 친구는 고양이를 데리고 택시에 타서 동물 병원에 가자고 했다. 난 고작 10살이었지만, 그 택시 운전사의 말이 아직도 생각난다.
"재수 없게 고양이를 태워."
지금 같으면 뭐라고 했을 텐데, 그때는 내가 너무 놀란 상태였고 무엇보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래서 동물 병원에서 엄마한테 다시 묻기까지 했다.
"엄마, 아까 택시 아저씨가 그렇게 말한 거 맞아?"
그렇다고 했다. 엄마는 고양이는 재수 없는 동물로 여겨지고, 또 더군다나 피도 흘리며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싫어한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고양이는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럽고, 더군다나 연약한 아이가 트럭에 깔려 죽어가는 가슴이 찢어지는 상황인데, 재수 없다는 생각과 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에서야 돌이켜 보면 태워준 것에 감사하다. 말로는 투덜댔지만, 돈이 이유였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 기사는 어른 한 명과 아이 셋 그리고 다친 고양이라는 거대 무리를 태워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택시 운전사와 퇴근 후임에도 재출근 해준 위대한 수의사 덕분에 약을 줘서 고양이를 편하게 보내줄 수 있었다.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면서 고양이의 죽음과 관련된 택시 운전사와의 일화가 생각났다. 왜냐하면, 택시 운전사의 단순한 일 즉, "누군가를 태운다"에서 그 "누군가" 도 많은 가치 판단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 이외에 어디로, 언제까지, 어떻게 등의 선택 상황에서도 개인의 가치관이 들어간다. 영화「택시운전사」에도 계속 나온다. 나는 손님을 태우고 데려다주는 사람일 뿐이라는 말들이 말이다. 주인공은 계약 관계에서 ‘다시 서울로 데려다 주기’를 완료하지 못해서 다시 광주로 되돌아간다. 이 때는 한국인으로서 아니,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한다는 생각과 함께 ‘택시 운전사’ 로서 ‘업무’를 완료하기 위한 책임감도 함께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이 외국인임에도 광주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을 위해서 이런 것을 해주기 때문에 나는 한국인으로서 해야 한다'라는 생각은 택시 운전사가 하지 않아도 될 생각이다. '내가 왜 이런 것 까지 신경 써야 돼, 내가 왜 이런 위험한 데를 가야 돼, 택시 운전사로서 이 돈에 대한 나의 역할은 여기까지야.'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며 그렇게 생각한다고 욕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는 개인의 양심의 범위까지 나의 '업무'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김사복처럼 말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며 내가 했던 일에 대해 성찰하게 되었다. 지금 내가 힘들기 때문에, 짜증 나는 병원 때문에 나의 업무를 계속 축소시키려고 했던 태도를 반성하게 된다.
'나는 어차피 동의서에 사인받는 동의서충이고, 병원은 오직 사인이 되어 있냐 안 되어 있냐만 체크하니까, 나는 사인만 받으면 돼.'
검사에 대해서 설명하고 이해했는지 확인하고, 환자의 동의를 얻는 과정을 단순히 '사인받기'로 환원시켜버리고, 나의 인턴으로서의 일을 '사인받는 일'로 축소시킨 것이다. 김사복이 자신의 업무를 양심에 따라 확장시켰던 반면, 나는 나의 업무를 편의에 따라 축소시켰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하는 원인을 찾고, 구조적 문제를 분석함은 물론 중요하겠다. 그 일에 집중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전공의의 ‘수련’이 아닌 ‘잡일꾼’으로 전락해 버린 시스템의 만의 탓은 아니라는 생각이 영화를 보면서 들었다. 나는 인턴의 일이 힘들다는 이유로 나의 양심을 저버린 것이다. 이 사실을 인지하면 괴롭고 또 분해서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학생 때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좋은 의사’가 되기 위한 나의 마음들이 모두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린 것 같기 때문이다.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를 말할 때 자주 나오는 말이 있다. 의사에게는 수천, 수만 명 중에 한 명일 뿐이지만, 환자에게는 100% 라는 말이다. 근데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커피를 파는 사람도, 회사에서 사무 업무를 하는 사람도,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우리 모두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산다. 김사복도 수없이 많은 손님들을 태운다.
일의 범위를 '조금' 더 넓게 만들어 에너지와 정성을 더 쏟는 것은 사실 '조금' 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지금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그렇게 동의서를 받고, 피를 뽑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