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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여해 Jun 17. 2021

「 어떤 양형 이유 」를 읽고

판사와 의사의 공통점들

어떤 양형 이유

# 박주영

# 김영사

# 2019년 7월 


# 한 줄 추천평    : ★★★★★ 판사의 고민을 엿보며 세상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


# 읽기 쉬는 정도 :  ★★★★★  재미있게 잘 읽힌다.










힘없는 정의는 무력하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 정의와 힘은 동시에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정의가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의가 되어야 한다. 정의가 시비의 대상이 되기 쉬우나, 힘은 시비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정의는 강해지기 힘들다. 결국 강한 것이 정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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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 의사의 눈으로 보게 되는 「 어떤 양형 이유 」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내용들이 있어 내가 일하는 환경이 나의 생각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이 병원에 오기까지 다양한 ‘사건’ 들을 겪는데, 이것은 비단 그 환자 자신의 몸 문제뿐만 아니라 환자를 둘러싼 환경도 그 사건들에 영향을 미친다. 이 책에 나오는 법원까지 온 ‘사건’ 들과 같았다. 단순히 ‘A 가 B를 때렸다’로 법원에 왔다면 판결 과정에서 보면 단순 저 한 문장으로 사건을 볼 수 없다. 

판결과 진단은 비슷하다. 특히나 작은 부분에서 치열하게 고민한다는 점에서 이 책에서 본 판사의 모습은 병리과 의사와 비슷하게 보인다. 멀리서 보면 법복을 입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람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과 해석을 하고 있을 것이다. 병리과 의사도 마찬가지이다. 혼자 가만히 앉아서 고요 속에 현미경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 현미경 속에 비치는 세포가 아주 악질의 암세포인지, 그냥저냥 약에 잘 듣는 암세포인지 아니면 암 인척 하지만 정상 세포인지 판단해야 한다. 그 판단 속에 환자의 앞으로의 치료가 결정되고, 수명이 얼마나 될 거다 라고도 얘기할 수 있게 된다. 판사의 판결로써 그 사람이 구속되는지, 벌금을 내는지, 무죄 방면되는지 결정되는 것이랑 비슷하다
 
‘... 팩트, 즉 사실관계를 확정하는 일이 재판의 8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겨우 2할 남짓의 해석의 영역이다.’ 교과서에서는 명확한, 팩트들이 임상의 영역에서 환자와 접촉하기 시작하면 팩트의 영역은 실선이 아니라 그라데이션으로 변한다. 분명히 교과서에서는 명확했는데, 왜 이렇게 애매모호 한 환자들이 많은 것일까. 진단이 애매해지고, 병은 이것도 될 수 있고, 저것도 될 수 있게 된다. 차라리 치료가 다양하지 않음을 감사해야 할 정도이다.

 ’ 법정은 선악의 공론장이 아니다.’는 말도 그렇다. 병원은 선악의 공론장이 아니다. 자기는 홀몸으로 딸, 아들 번듯하게 길렀고, 법 없이도 살 만큼 착하게 살았고, 나쁜 짓도 안 했는데 왜 이런 몹쓸 병에 걸렸냐고 묻는다. 교통사고로 두개골이 부서져서 뇌가 튀어나오고, 뇌척수액과 혈액이 섞여서 뚝뚝 떨어지며 병원에 오기 전에 이미 즉사했지만, 이는 그 사람이 악하게 살아서 발생한 것은 아니다.

‘좋은 판사의 덕목으로 여러 가지가 꼽히지만, 그중에서도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판사들이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소송관계인 중 판사가 가장 무지하다. 모르려면 차라리 완벽하게 몰라야 한다. 세상과 인간을 어설프게 아는 것은 편견일 수도, 위험할 수도 있다.’

의사도 마찬가지다.


# 5분 재판과 30초 진료


일이 많다고 징징대려는 것이 아니다.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으나 어깨너머로 본 바에 의하면 검찰이나 경찰 역시 법원보다 일이 적지는 않았다. 두꺼운 수사기록에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디 이쪽뿐이겠는가. 정부나 공공기관, 회사, 공장, 자영업자는 어떤가. 아내의 가사노동보다 내 노동이 더 많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과로사회의 고단한 일상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대한민국에 별로 없다... 다시 말하지만 격무를 하소연하는 게 아니다. 재판의 부실화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개인적 업무가 지체되면 한 기업과 가정이 피해를 입는 데 그치지만, 사법기관의 업무량이 충실한 업무 수행을 힘들게 할 정도에 이르면, 온 국민이 피해를 본다. 정의가 망가지고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기본권이 침해된다. 인생이 무너지고 사회가 병든다. 판사의 권한이 막강할수록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물론 격무가 엉터리 재판을 가려주는 치트키가 될 수는 없다. 다만 현재 우리 사법시스템에 이런 문제가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야 제대로 된 비판을 할 수 있다.’ 

 ‘믿기 어렵겠지만 대한민국 법원처럼 사건을 빨리 처리하는 법원은 많지 않다. 빨리 처리하니 수준이 엉망일까? 더욱 믿기 어렵겠지만 대한민국처럼 판사 개인의 역량 (정확성) 이 높은 나라 역시 흔한 편은 아니다. 사건 처리도 빠르고 정확한데 무엇이 문제인가? 솔직히 말하면 사법의 수준, 그 기대치가 너무 높게 설정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국민들 탓이 아니다. 법원이 솔직하지 못한 탓이다. 속도를 얻으면 품질을 잃고, 품질을 얻으면 속도를 잃는 게 당연하다. 빠른 속도에 품질까지 얻으려면 막대한 비용을 잃고, 많은 돈을 아끼려면 속도와 품질을 잃는다.... 아니, 능력은 뛰어나지만 조직의 결정에 어지간하면 불평하지 않는 판사들의 습성을 이용해 판사들을 쥐어짜면 어지간하게는 해결되었다. 그렇게 죽 이어져 왔다. 이게 누적되어 감당 못할 지경까지 온 것이다.’ 
 
‘판사의 정원, 사건 처리를 늦추거나 소송비용을 높이는 방안 등이 그것이다. ... 국민의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나 재판청구권을 침해할 측면이 있어 쉽게 취할 방법은 아니다. 가장 유력한 건 판사의 증원이다. 그러나 이 역시 쉽지 않다. 판사 수는 법률사항이라 일거에 많이 늘릴 수 없다. 또 판사만 늘린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법정도, 재판부 구성원도 같이 늘려야 한다. 돈이 많이 든다. 그런데 법원은 돈이 없다. (사법부 독립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나는 주저 없이 독자적 예산편성권이 없는 것이라고 답하겠다).’ 

그대로 의사와 의료 시스템으로 바꿔도 될 정도로 똑같다. 근데 의료와 병원은 낮은 의료수가 때문인 게 그 원인인데 법원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마찬 가지인 모양이다. 나라에서 세금으로 월급을 주는 건데, 월급을 적게 주면서 일은 많고, 사람 수는 법적으로 규제되어 있고, 그러니까 그냥 까라면 까로 마른오징어에서 물기 짜내듯 에너지를 짜내서 일을 시키는 거다. 5분 재판을 하면서 자책감에 시달리는 판사들이 많듯이, 3초 진료도 의사가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 AI 가 전문직을 대체할 것인가


‘SF 소설의 어두운 전망이 현실로 엄습하는 시대에, 형사법정에 앉아 매주 인간성을 회의하며 살아가는 내가 두려운 것은, 인간이 AI와 기계로 대체되거나 이것들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다. 가장 두려운 건 인간성이나 인간에 내재된 선함과 신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인간성을 학습하도록 설계된 AI와 사이코패스 인간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사이코패스 인간을 선택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AI 가 의사를 대체할 것이라는 우려 속에서 박주영 판사의 생각이 내 생각과 비슷하다. 인공지능 기능을 가진 프로그램이 의사의 진단과 치료를 보조할 수는 있어도 결국 사람과 사람이 마주하여 나누는 대화를 대체할 수는 없기 때문에 절대로 로봇이 사람 의사를 대체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그런 로봇보다 좀 더 인간성을 가진 인간이 의사의 역할을 해야 제대로 된 ’ 의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를 반성하게 한다. 



# 아무것도 모르는 눈빛의 환자들 


‘A 같은 사회적 약자들의 사건은 대부분 기록이 얇다. 법정에서 본 이들은 돈 많은 피고인들의 하루치 벌금 노역에도 미치지 못하는 약식 벌금 몇십만 원을 깎으려 정식재판을 청구하고 외국어보다 더 어려운 말을 지껄여대는 판사의 눈치를 보고 온갖 타박을 받으며 나홀로 소송을 한다. 자신에게는 전 재산일 수도 있는 3,000 만원 까지를 소액사건이라 분류해놓은 민사법정에서 5분 재판을 받으려 50분을 기다린다. 그렇게 힘들게 한 소송에서 진다 해도 이유조차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는다.’ 

병원에 온 사람들과 똑같다. 자신이 어디가 아프고 불편한 지를 정확한 말로 표현할 줄도 모르는 SES 낮은 분들... 아무리 쉬운 말로 설명을 해도 전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눈빛의 할머니, 할아버지들. 외국어보다 더 어려운 말을 지껄여대는 의사의 눈치를 보고 검사 결과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데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게 훤히 보인다. 이런 분들이 이해할 수 있게끔 설명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갈까? 대부분 시도하지 않기에 몇 분이 걸리는지 재 본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의사에게는 history taking이라는 병력 청취가 가장 기본 중에 기본이다. 하지만 이런 분들에게선 병력 청취도 힘들다. 왜냐하면 자기가 어떤 병이었고,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 모르시기 때문이다. 제대로 이해하게끔 설명을 들은 적도 없고, 그래서 기억할 리가 없다. 



 # 법대(의대) 라는 보호막을 벗어난 현실이란


‘꿈을 좇아 힘들게 도착한 곳이 상상과 너무 다르다는 당혹감, 목표를 상실한 공허감’ 
‘아이언맨 슈트를 벗고 맨몸으로 거리에 나서면, 나는 조폭 피고인의 한주먹거리도 아니다.‘

항상 ‘바깥은 정글이야!’라고 외치던 교수님이 계셨다. 그러한 정글 속에서, 소송과 좋은 진료는 한 끗 차이이고, 언제든지 쇠고랑을 찰 수 있다고 하셨다. 얇은 하얀 가운 한 장이 우리를 지켜주는 거고, 이는 언제든지 벗겨질 수 있는 것이다. 밤새 운영되는 응급실을 혼자 지키면서 다양한 죽음을 보았다. 누군가 돌아가셔서 오면 형사도 함께 오는데, 뭔가 촉이 왔는지 형사의 눈빛을 쏘면서 이 사람이 어떻게 죽었고, 언제 죽었는지 추측할 수 있는 의학적인 설명을 요구하신다. 이제 갓 의대를 졸업하였지만, '의사'이기에 내가 한 말엔 힘이 실렸다. 가운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는 게 느껴졌다. 



 # 우리는 모두 노동자이다.


내가 팔 것은 나의 몸뚱이, 노동력밖에 없는 노동자이다. 보호 장구도 없이, 안전 수칙도 없이, 비상구의 위치도 모른 채 위험한 작업에 내몰리는 사람들이 안타깝고, 그들의 죽음은 개죽음이라는 말 밖에 표현할 수가 없는 것 같다. 나는 시시포스의 삶을 살고 있는 계층이라는 동류감을 느낀다. 박주영 판사도 나의 생각과 비슷하게 역시 노동자라는 의식이 있었다. ’... 나 역시 판결문을 생산하는 책상물림 노동자다. ... 정신노동이 주이지만 육체노동도 상당하다. 체력이 달리기 시작하면 판사 노릇도 오래 하긴 힘들다. ... 판사들 역시 직업병에 시달린다. ‘

어떤 
의사들은 스스로 ‘노동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진다. 남들보다 조금 더 공부한 노동자일 뿐, 결국은 팔 것은 노동력뿐인 노동자이다. 그리고 그 노동력에 대한 값어치는 자본가가 매긴다. 나 스스로 자본가가 되지 않는 이상 나의 노동력은 끝없이 착취당하는 단순 생산수단일 뿐이다. ‘장황하지만, 기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우리 모두 노동자라는 사실이다.’ 의사의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에 관해선 할 말이 너무 많아 따로 떼어내서 쓸 것이다. 



# 소수자에 대한 보호란?


소수자에 대한 시선이 나와 비슷했지만, 해석은 신선하다. 가장 낮은 곳의 사람들까지 보호해주려고 하면 할수록, 그 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보호해주는 벽도 두터워지는 거라고. 즉, 법의 보호가 100이라는 총한계를 가지고 낮은 사람에게 51 이 가면 높은 사람에게 49가 와서 나의 보호를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낮은 사람에게 +1이 되면 높은 사람에게도 +1 또는 그보다 더 한 + 가 생기는 것이라는 해석이다.

‘누군가는 노숙인이나 노인이나, 난민이나 동성애자나, 성전환자나 이주노동자나, 장애인이나 극빈자들이 사회적 비용만 증가시키고 자신의 저녁 있는 삶을 위태롭게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보호된다면 적어도 그 누군가의 권리는 더 두터워진다. 그 누군가는 좀 더 법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된다. 이기적이고 계산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순진한 인류애보다는 이쪽이 보다 더 좋은 답변이다. 이기심이 솔직하고, 더 견고하다. 연민에 호소한 기부 광고보다 소득공제를 해주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무엇이 고상한 답변인지를 가리는 장이 아니다. 무엇이 소수자를, 아니 우리 모두를 더 효율적으로, 더 오래, 더 견고하게 보호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 너무 좋았던 「 어떤 양형 이유 」에서 아쉬웠던 부분


마지막으로 이 책에 관해 조금 더 기대했던 것이 있다면 유전무죄 무전유죄에 대한 검찰의 판결에 대한 판사의 생각이다. 사실 그것에 대한 설명이 가장 궁금한데 말을 극도로 아낀 느낌이다. 또, 사법살인이나 사법 농단과 관련해서는 굉장히 두루뭉술하게 서술한 느낌이다.  


국민이자 독자로서 아쉬울 뿐이지만 이해는 간다. 만약 나보고 의사들을 까는 내용을 써야 한다면, 후배이자 같은 길을 가는 사람으로서 노골적으로 비판하며 적기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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