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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솔 Jun 16. 2022

아이와 마음 따뜻한 대화를 나눈 밤의 기록

우리는 공명하고 있었다.


벌써 밤 12시가 다 되어갔다.



윤아가 내게 마음을 활짝 열고, 자기의 속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중한 지금을 계속 이어가고 싶은데, 시간이 너무 늦어 끝내야만 할 것 같아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윤아도 역시 족히 30분 전부터는 잠이 몰려오는 것 같았지만, 엄마와 마음이 이어져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지금 이 시간을 더 누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끝내기 아쉬운 마음이 들 정도로 아이와 아름다운 대화의 시간을 갖다니. 서로에게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엄마로서 아이에게 전하고 싶은 사랑을 그대로 꺼내 보이고, 아이는 그 사랑을 온전히 받았다. 사랑을 받은 것도 주는 것도 똑같은 사랑이기에 대화를 마무리 한 윤아와 내 마음엔 충만함이 가득 찼다. 힐링의 시간.



작정하고 대화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11시가 넘은 시간에 어쩌다 윤아와 내가 식탁에 마주 앉았을 뿐이고, 나는 출출해서 수미감자칩을 먹으며 과자 봉지 뒷면을 보고 시시콜콜한 질문 몇 개를 던졌을 뿐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수미 감자가 제일 많이 생산되는 지역은 어디게? 엄마 생일 선물은 진짜 안 사줄 거야? 이런 질문들.



윤아는 오만 원을 넘지 않는 선에서 선물을 고르라고 했기 때문에, 나는 책을 네 권 사달라고 했다. 약간 넘을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쯤이야라고 생각했다. 윤아는 자기가 책을 골라줘도 되냐면서 <엄마는 화났다>라는 책의 제목을 말했다.



"야, 솔직히 엄마는 별로 화 안 내잖아. 아침에 늦으니까 빨리하라고 버럭 소리는 지르지만. 그건 화내는 거 아닌데. 진심으로 엄마가 화내는 걸 고쳐야 할 필요가 있어 보여?"



"엄마, 실은 제 친구들이 다 저를 부러워해요. 자기 엄마랑 바꾸재요. 엄마가 자기 엄마였으면 좋겠데요. 얼마면 되냐던데요?"



"그래서 얼마나 준다니? 엄마가 진짜 그런 엄마로 등극한 거니. 세상에. 너무 신난다. 거 봐. 엄마가 생각해도 엄마는 좋은 엄마라니까."



난 솔직히 윤아에게 있어서는 자신감에 차있는 엄마다. 이것은 평소에 내가 가지는 근자감과는 결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언제나 윤아에게 사랑을 듬뿍 주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학기 초 윤아 담임 선생님과 전화 상담을 할 때도 선생님은 상담 질문지에 아이에게 미안한 점이나 걱정이 되는 점이 있으면 적어달라는 란에 '특별히 미안한 것 없음^^', '걱정되는 점 없음'이라고 적은 어머님을 만나 건 교사 생활 중 처음이라고 말씀하셨다. 난 진심으로 내가 주고 있는 사랑이 아이에게 충분히 전해지고 있고 아이도 그걸 알고 있다는 걸 늘 느끼는 상태라 미안하거나 걱정되는 것이 없는 게 사실이다. 물론 아이의 내향적인 성향을 고려하면 걱정해야 할 만한 상황들을 꼽을 수 있었겠지만, 그 또한 윤아가 부딪히면서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부모가 돼서 아이에게 걱정되는 것이 없을 수 있는지, 어쩜 아이 앞에서 이리 당당할 수 있는지 싶겠지만, 진심이다.



우리 애가 착해서가 아니라, 공부를 잘해서가 아니라, 게으르고 소심한 성격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보고 있는 그대로 아이에게 반짝반짝 빛이 나는데, 미안할 것이 무엇이며 또 걱정을 미리 사서 가져올 것은 무엇일까.



내가 아이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할 수 있음에 감사할 뿐이다. 내가 아이에게 사랑을 마음껏 퍼 줄 수 있는 사람이라 행복하고 때로는 감격스럽다. 나를 그런 엄마가 될 수 있도록 해 준 아이들에게도 너무 감사하다. 더할 나위 없는 감사의 마음이 차올랐다.



그렇다고 내가 주는 사랑이라는 게 오냐오냐하며 아이가 최대한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보육에 힘쓰고 있다는 의미도 아니다. 아이가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서 쿨하게 책임을 지는 법을 알려주고, 꼭 착한 사람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슬픔을 털어내는 법은 슬픔을 실컷 느껴야 한다며 슬픈 날이면 아이들 앞에서 대놓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아무 이유 없이 아이를 향해 반달눈을 만들며 미소를 보낸다. (실은 이유가 없지 않다. 보고만 있어도 이쁜걸) 나는 아이에게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배운 가장 소중한 것들을 전해주고 있는 중이다. 내가 나의 삶을 사랑하게 된 것처럼 아이도 자신의 삶을 사랑할 수 있는 도구들을 발견하기를 바라면서.




아무튼, 우리의 대화는 시작되었다. 친구들이 학원 스케줄이 꽉 차 힘들어 보인다는 이야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친구인데 집에서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해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 친구들끼리 속상한 이야기를 같이 털어놔야 마음이 시원해진다는 이야기 등등. 자신은 소심해서 마음을 잘 얘기 못하고 쭈그려있다는 얘기.




자기는 소심하다는 말로 이미 방어벽을 쳐버린 윤아가 늘 마음에 걸렸다. 자기는 용기 없고, 소심해서 의견을 말하기 어려운 상황을 이제는 당연하듯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윤아에게 무슨 말을 해주면 좋을까? 친한 친구인데 거절하면 화낼까 봐 무서워서 친구의 의견을 그냥 따른다는 아이. 반에서 합창을 하는데, 솔로 파트를 꼭 하고 싶다며 밤새 영어 팝송을 외우고 외워 학교에 가지만 솔로 파트에 손들고 지원할 용기를 내지 못해 아쉬움을 가득 안고 돌아오는 아이에게 나는 어떤 말을 들려줄 수 있을까?




윤아야, 친구가 무서워? 친한 친구잖아. 친구관계에서는 거절해도 괜찮아. 그것 때문에 너를 미워하거나 떠나지 않아. 네가 무섭다고 느끼는 건 성향의 차이라서 그럴 수도 있어. 윤아는 내향적인 성향이고 그 친구는 외향적인 성향이라 겉으로 볼 때는 외향적인 친구가 더 적극적이고 강해 보일 수는 있지. 하지만 어떤 게 더 좋고 나쁜 건 아니야. 친구의 강한 표현은 성향에 의한 차이인 거지 윤아를 두렵게 하려는 건 아니라는 건 꼭 기억하면 좋겠어. 그 친구는 그렇게 표현하고, 윤아는 차분히 윤아의 방식대로 표현하면 되는 거야.




그런데 엄마도 윤아 마음 충분히 이해해. 엄마도 어렸을 때 그랬어. 친한 친구인데, 무섭긴 하더라. 거절하면 화낼 것 같고, 그러다 사이라도 틀어지면 학교생활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되고 말이야. 말 못 하겠더라. 윤아의 마음을 알 것 같아. 그땐 엄마도 고민이 많았는데, 해결 방법을 모르겠더라고. 그러다 중학생이 되었는데, 그때부터 엄마는 성격을 바꾼 거 같아. 일부러 더 웃기고, 활발한 척, 사람 좋은 척, 웬만한 일에는 화도 잘 안 내는 그런 사람으로. 그럼 친구들이 엄마를 좋아해 줄 것 같더라고. 근데 솔직히 너무 힘들었어. 활발하고 웃기는 사람인 척 지냈지만, 작은 실수에도 마음을 크게 쓰고, 친구들의 반응을 살피느라 엄마 마음이 더 너덜너덜해졌던 것 같아. 친구들은 엄마가 화도 잘 안 내고 성격 좋아 보이니까 오히려 함부로 대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거든. 엄마는 우리 윤아가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야.



그러니까 지금부터 우리 연습해 보자. 너무 어려운 거 알지. 엄마는 솔직히 지금도 어렵거든. 우리 어떻게 하면 좀 더 나아질 수 있을지 같이 생각해 보는 건 어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윤아는 순한 양 같았다. 내 이야기를 귀담아들었고, 이야기에 공감하며 작고 떨리는 입술을 열어 자기의 이야기를 했다. 떨리는 입술. 자신의 속 마음을 꺼내놓기 어려운 윤아는 내 앞에서도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입 밖으로 내면 안 될 것 같던 이야기들. 자기 안에 꼭 감추어 놓았던 어려움들을 작은 목소리로 풀어냈다. 비록 작고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거기에는 나와 함께 만든 지금 이 공간이 더없이 안전한 곳이고, 신뢰와 사랑이 충만한 공간임을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감사했다.




윤아는 수학 학원에서 선생님이 다른 아이들 때문에 바빠 보이는데 자기까지 앞으로 나가서 질문하면 선생님이 힘들어질까 봐 나가기 어렵다고 했다. 작은 수학 교습소라 개인적으로 책을 들고나가서 개념을 듣고 문제를 푸는 시스템인데, 윤아는 거의 나가지 않는단다. 나갔는데 선생님이 왜 나왔느냐고 물어볼까 봐 걱정된다고. 아. 우리 윤아가 그렇구나. 앞으로 나가서 물어보는 게 당연한 건데,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는 것조차도 힘든 아이였구나. 이렇게까지 얇은 유리막처럼 여리고 여린 아이인 줄 몰랐다. 그리고 마음이 짠했다. 일주일에 세 번씩 나간 수학 학원에서 매번 그런 갈등을 겪어오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어려움. 선생님한테 설명을 안 들어도 대충 알 것 같아서 그냥 넘어갔다고 말한 아이는, 매시간 얼마나 마음에 생채기가 났던 걸까. 그리고 혼자서 자기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마음을 달랬겠지.



"엄마, 윤아는 너무 소심해서 그런 것도 못하겠어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너무 신경이 쓰이고 겁이 나요."


윤아야 엄마가 생각할 땐, 윤아가 소심해서 그런 게 아니라 윤아가 다른 사람을 배려해 주는 마음이 커서 그런 거야. (이 말을 듣고 있는 윤아의 눈이 동그래지며 반짝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혹시나 윤아 때문에 불편하게 느낄까 봐, 윤아는 그걸 지켜주려고 하는 거잖아. 그렇지?



윤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잘못된 건 아니야. 멋진 모습이야. 그런데 한 가지 윤아가 놓치고 있는 게 있어. 다른 사람을 배려해 주느라 나를 배려해 주지 못한 거 말이야. 다른 사람을 지켜주고 싶은 것처럼 윤아는 윤아 스스로도 배려해 주고 불편하지 않게 지켜주는 게 필요하거든. 더 중요한 건, 나를 먼저 배려해 줄 수 있을 때, 다른 사람에게도 해 줄 수 있게 되는 거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윤아의 마음을 잘 알 수 없으니까, 윤아가 윤아의 마음을 스스로 잘 살펴서 불편하지 않게 배려해 주고 살펴주는 건 정말 중요한 거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너무 신경에 쓰이지. 맞아. 완벽하지 않은 걸 꺼내 보이면 날 한심하게 바라볼 것 같고 말이지. 엄마도 윤아랑 똑같아. 엄마가 매일 노래 부르고 영상 올리는 거 있잖아. 실은 첫 영상을 올리는데 너무 두렵고 떨렸어. 완벽하게 잘하지도 못하면서 이런 걸 올리면 사람들이 엄마를 어떻게 생각할까 두렵더라고. 엄마가 매일 신나게 노래 부르고 나서, 그런 걱정을 하면서 영상을 올리는 줄 몰랐지? 엄마는 정말 즐거운 일이 생기면 주변에 너무 알리고 싶어. 엄마가 알게 된 즐거움을 나누고 싶거든. 노래가 그런 거야. 엄마가 노래 부르는 동안 너무 행복해서 마구마구 알리고 싶더라. 그런데 그 결과물인 노래가 너무 완벽하지 못해서 늘 그 자리에서 주춤해. 이런 모습을 올려도 될까. 그런데 엄마가 노래를 올려보니까 말이야, 사람들이 엄마의 그 모습 그대로를 보기 좋다 하고, 응원도 해주더라고. 엄마도 이제야 부족한 내 모습을 그냥 꺼내 보여도 괜찮다는 걸 배우고 있어. 윤아도 엄마처럼 조금씩 용기 내 보면 좋을 것 같은데, 어렵다는 거 이해해. 그러니 일단, 엄마가 먼저 해볼게. 엄마도 윤아와 똑같이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고 떨려. 하지만 엄마가 그 길에 먼저 용기 내서 다가가 볼게. 그리고 윤아와 함께 가줄게.




좋아요. 엄마. 그럼, 저도 해 볼게요.



아이와 내 마음이 온전히 공명되고 있는 순간임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둘 사이에는 순수한 사랑과 서로를 향한 신뢰만이 맴돌고 있었다.



내 아이가 내가 나눠 주는 자양분을 받아 싹 틔우며 자라나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기쁨이다. 내가 가진 것을 주더라도 아이는 자신의 모습대로 꽃피울 테지. 나와는 다른 모습으로. 그것이 바로 생의 아름다움이지.



내 기억이 맞는다면 윤아와 이런 교감을 나눈 게 세 번째이다. 첫 번째는 윤아가 아홉 살 때였는데, 난 그날의 이야기 담아 <아홉 살 세상>이라는 시와 글로 남겼다. 두 번째는 작년 이맘때였던 것 같은데, 그날도 마음에 충만함이 가득했었다. 아쉽게도 기록으로 남긴 것이 없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번에는 기록했다. 잘했다.



그리고 오늘 윤아와 나는 며칠 전 아이가 솔로 파트를 위해 열심히 연습했던 노래 Memories_Maroon 5를 함께 불러 SNS에 올렸다. 윤아와 내가 함께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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