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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솔 Nov 03. 2022

가을밤 울보가 되다

매일 이런 건 아니야


남편이 도착하기 전에 저녁밥을 해놓으려고 서둘러 쌀통을 열었다. 햅쌀, 청보리, 검은 현미, 찹쌀 등을 골고루 섞어 쌀을 씻는데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별것도 아니지만 남편을 위해 정성을 들이고 있는 마음이 스스로 좋았다. 남편에게 자연스러운 감정은 사랑인데, 종종 이 마음을 잘 잊고 지낸다.


머나먼 별빛 저 별에서도 노랠 부르는 사랑 살겠지.

밤이면 오손도손 그리운 것들 모아서 노랠 지어 부르겠지.

- 가을밤에 든 생각, 잔나비-


핸드폰으로 틀어놓은 노래에서 잔나비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처음 듣는 노래마저 마음을 심쿵하게 했다. 기타 선율에 아름답고 잔잔한 가사가 감미로운 목소리에 실려왔다. 갑자기 울컥하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행복의 벅참을 참을 수가 없었다. 뭐 이렇게 뜬금없는 이 순간이 아름답고 행복한 거지? 왜 지금 행복한 거야?  



저녁을 준비하다 내일 탄천으로 간식을 싸서 나들이를 간다는 솔이의 말이 생각났다. 소떡소떡을 싸 달라고 했는데 집에는 떡이 없다는 사실도 함께. 집 근처 떡집은 문을 닫았을 것 같은데 어쩌지. 굳이 소떡소떡을 싸가야 하겠니. 과자나 과일을 가져가면 안 되는 거니? 집에 있지도 않은 아이를 불러보 혼자 타협을 시도해 본다. 그러다 6학년 언니들은 에버랜드로 소풍을 갔다는데 서운하지 않으냐고 묻는 대답에 자기는 내일 탄천 가니까 괜찮다고 신나게 말하던 솔이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사랑스러운 아이. 소떡소떡 그게 뭐 어려운 거라고 해주면 될 것을.



끓이던 찌개의 불을 끄고 옷을 갈아입었다. 해가 지고 제법 쌀쌀한 저녁이니 두툼한 외투를 챙겼다. 얼른 뛰어갔다가 와야지. 아파트 사이사이를 건너 떡집을 향하고 있는 발걸음이 경쾌했다. 바스락거리는 낙엽들을 밟으며 총총 달리는 내가 보기에 좋았다. 실은 그 순간도 행복했다고 고백한다. 아이의 부탁을 저버릴 수 없어 저녁을 하던 중에 나왔지만, 해 줄 수 있다는 게 진심 기뻤고, 달리면서 오늘 채우지 못한 운동량을 채울 수 있어서도 기뻤다. 그리고 이 순간조차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나라서 감사했다.



사장님, 가래떡 있어요?

아뇨. 다 팔렸어요.

에고.. 그럼 쌀 떡볶이 떡은 있어요?

네. 그건 있어요.



이내 손에는 삼천 원짜리 떡볶이 떡이 들려있었다. 말랑말랑한 것이 오히려 사이즈도 적당하고 소떡소떡에 더 안성맞춤이었다. 대단한 성과를 이뤄낸 것처럼 뿌듯했다. 집으로 돌아갈 때는 반대쪽으로 가볼까. 몇몇 차들이 지나다니는 인적이 드문 조용한 가로수 길을 뛰고 있는데, 또 갑자기 아까 노래 들으며 밥을 짓던 그때처럼 눈물이 왈칵 솟았다. 행복한 눈물이었다. 말하기도 쑥스럽지만 떡을 들고 뛰어가는 이 순간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내 삶이 온통 별것도 아닌 것들의 아름다움으로 꽉 차서. 나만 혼자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행복해버려서.



달려오는 버스의 헤드라이트 불빛에 내가 어떤 모습으로 비칠지 상상해 봤다. 인적이 드문 가로수길에서 한 손에는 하얀 떡을 들고 얼굴엔 잔뜩 눈물을 머금은 채 뛰고 있는 중년의 아줌마라니. 흠. 아름답지는 않겠구나.


가을밤 울보가 되어버린 오늘.

나는 기꺼이 행복한 울보가 되어보련다.

누군가에게는 사연 있는 아줌마로 보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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