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동안 대학로에 있는 소극장에서 <레미제라블> 뮤지컬 무대에 올랐다. 한없이 늘어져 있는 월요일 오후 지난 이틀간 꿈처럼 지나온 시간을 기억해 내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질 않는다. 그저 행복했고 좋았다는 아련한 감각뿐. 행복한 순간이라 꽉 붙들어 놓고 싶지만, 그 또한 파도처럼 지나가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붙잡아지지 않는다. 나에게 찾아온 고통과 불행한 순간을 붙들지 않게 되니, 행복한 순간도 마찬가지다. 좋은 것만 취사선택해서 붙들 수 없음을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현재를 충분히 살아내는 것. 감각하는 것. 경험하는 것. 그것뿐이다. 나에게 찾아온 매 순간을 충분히 누리고 아름답게 흘려보낸다.
공연을 한 달 앞두고 뒤늦게 연습팀에 합류했다. 합창 연습은 함께 시작을 했지만 도중에 수술을 받느라 어렵사리 뒤늦게 참여하게 됐다. 그런데 막상 연습을 시작하고 보니 내게 맡겨진 작은 역할들에 아쉬움을 품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분명 테나르디에 부인이라는 역할도 있었지만, 더블 캐스팅으로 부인 역할을 하지 않는 날에는 존재감이 거의 없는 역할이었으니. 물론 나도 알고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알 것이다. 얼마나 적반하장 같은 소리인지. 공연에 참여만 할 수 있어도 기쁘겠다 말하던 내가 게다가 공연 한 달 남은 시점에 합류해서 할 소리는 결코 아니라는 건 나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역이라도 감지덕지한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마음에 불쑥 찾아 들어온 아쉬움은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었다. 하지만 찾아온 마음을 어쩌겠는가.
더 멋진 솔로곡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 기왕이면 더 많은 역할을 하고 싶은 건 무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인생에서 주인공으로 주목받고 싶은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
이런 나를 알아차리니 자연스럽게 마음을 들여다보게 된다.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모습처럼 말하던 나는 연극에서 조차 존재감 없는 역할은 맡기 싫고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아 서운해하고 있었다. 무대에서도 현실에서도 나는 주목받고 싶어 한다. 주목받고 싶어 하는 나는 누구인가?
무대 위에 올라간 배우는 자신이 드러나면 안 된다. 배역이 보여야 한다. 주목받아야 하는 대상은 역할을 소화하고 있는 나라는 인물이 아닌 배역으로서의 삶이다. 가난한 자의 삶, 고통받는 죄수, 거리의 창녀 그리고 술집 여관 주인까지. 늘 입으로는 무대에서 내가 사라지기를 바란다고 외쳤지만, 실제 사람들이 나를 발견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게 솔직한 속내가 아니었을까. 좀 더 멋진 역할을 하면 내가 보이겠지, 주인공을 하면 내가 더 대단하게 보이겠지... 그렇다고 이런 마음을 가진 이중성을 스스로 자책할 마음은 없다. 마음의 민낯을 확인하며 민망함을 고백하는 나에게 그런 마음은 자연스러운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여본다.
이런 시간들을 통해 내게 맡겨진 단역들의 아름다움을 알았다. 스스로 빛나는 역할임을 배웠다. 나라는 에고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 주어진 배역의 삶을 최대한 느끼고 공감하여 몸으로 표현한다. 온몸으로 그 역할들을 표현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임무였고, 그것이 내가 그토록 원하는 자유였다. 나를 가두려는 모든 제약을 벗어나, 허락된 무대에서 자유롭게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나는 감옥에서 고역에 시달리며 괴로움을 토해내는 죄수가 됐고, 가난한 처지에도 흔들림 없는여인 판틴을 질투해 모함으로 내쫓는 방직공장 노동자가 됐고, 삶의 가장 밑바닥에서 가난과 굶주림에 찌들어 비참함을 살아가는 거지가 되어 바닥에서 뒹굴고 기어 다니며 구걸했다. 내 안에 있는 비참함을 그대로 내보였고, 분노와 절규를 그대로 꺼내 보인다. 진정 자유로웠다. 누가 나를 알아보든 말든 어떻게 판단을 하든 말든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물론 주목받는 역할도 즐겁다. 박수와 환호가 나오면 뭔가 잘 해낸 것 같아 으쓱해진다. 테나르디에 부인 역할이 그랬다. 잠깐 등장하지만 한껏 웃음을 줄 수 있는 매력적인 역할. 사람들의 호응은 그 순간 테나르디에 부부에게 주어진 선물 같은 것이니 감사하게 즐기고 흘려버리면 된다. 박수와 환호가 배역을 넘어선 나를 더 높이 들어 올리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마음을 지킬 수 있다면 텅 빈 무대를 보면서 공허함을 느낄 이유도 없을 것 같다. 남는 것은 지나간 순간에 대한 아련함이지, 하늘로 붕 떠올랐다 바닥으로 다시 내려앉은 내가 아니다. 주목받은 것이 나인 줄 착각하면 주목이 사라지는 순간의 초라함을 견뎌야 하는 것도 내 몫이다.
삶 역시 무대라는 공간과 다르지 않다. 인생에서도 내게 허락된 역할을. 나만의 무대를. 진심으로 살아내는 것. 그것이 내가 살아가고 싶은 모습이다. 무대를 통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배우고 있기에 늘 기대되고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