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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님 Jul 19. 2022

강릉 일기 #16

강릉을 떠나며

어느새 떠나야  시간이 왔다.  너른  어디에서 자야 하나 고민하다가 결국 거실에 둥지를 틀었던 첫날밤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가야  때가 되어 나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대청소를 했다. 혼자서도 어지간히 누비고 다녔나 보다. 화장실  개와   , 주방과 세탁실, 선룸과 마당까지  흔적이 없는 곳이 없다. 화장실의 비누 자국과 물때를 싹싹 문질러 지우고, 주방 싱크대의 음식 찌꺼기를 긁어모아 봉투에 담고, 구석구석 숨어있는  머리카락은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로 클로이 발자국을 닦았다. 청소한 집을 다시 더럽힐까 봐 클로이는 목줄을 길게 하여 마당에 내놓고 방방마다 청소상태와 보안장치를 점검한  현관문을 잠갔다.


그동안 정들었던 마당의 꽃과 나무들에게도 작별 인사를 했다. 첫날 선명하게 만개했던 능소화는 어느새 시들어 떨어지고 몇 송이 남지 않았다. 덩굴장미는 피고 지기를 거듭했지만 첫날과 다름없는 모습이다. 도착한 다음날부터 피기 시작했던 백합은 이제 마지막 꽃봉오리를 피우려 하고, 한 그루 오도카니 서 있는 해바라기는 겨우 봉오리가 맺히는 중이다. 첫날 노랗게 익어 주렁주렁 매달렸던 황매실은 이미 다람쥐와 새들이 다 먹어치웠고, 푸릇푸릇하던 홍매실은 이제 붉은 빛이 감돈다. 구석에 있어 뒤늦게 만나게 된 포도와 머루는 아직 열매가 작지만, 무더위와 장맛비를 이겨내며 무럭무럭 자라고 향기롭게 익어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둘러본 마당에 갖가지 열매가 풍성하다.


이곳에 지내는 동안 비가 오는 날이 오지 않는 날보다 많았는데, 오늘은 유난히 햇살이 뜨겁다. 짐을 싣느라고 마당을 몇 번 가로질렀더니 땀이 비 오듯 한다. 뭔가 낌새를 챈 클로이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다. 차 문을 열어주니 재빨리 올라탄다. 마지막으로 집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이곳에서 보낸 휴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뜻깊은 경험이었다. 무엇보다 오롯이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이어서 좋았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많이 신경을 쓰는 편이라 주변에 사람이 있으면 나 자신보다 그 사람들에게 더 집중한다. 그 사람이 앉은 자리는 편안한지, 먹는 음식이 입에는 맞는지, 마주 앉은 사람들끼리 서로 어색한 것은 아닌지 살핀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혼자이기 때문에 살펴야 할 다른 사람이 없었다. 내가 좋은 시간에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서,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내가 앉고 싶은 자리에 앉아,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보았다. 한동안은 그런 상황이 낯설고 어색하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지니 자유롭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자신에게 집중하는 경험이 누적되면서 나는 내 감각을 많이 신뢰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승인이나 거부 없이 내가 느끼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사실 우리의 감각은 매우 주관적이어서, 같은 자극에 대해 서로 다르게 느끼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여름마다 에어컨 온도 때문에 갈등을 겪는 부부들이 많은데, 서로 시원하다고 느끼는 기온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 집도 나 혼자 있을 때는 에어컨을 최소화하거나 26도 정도로 유지하지만, 남편은 그보다 훨씬 낮은 온도를 원한다. 함께 살기 위해서는 온도뿐 아니라 수많은 차원에서 우리는 자신의 감각을 다른 사람에게 맞추거나 타협해야 하는데, 이곳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맛있어?" 물어볼 필요 없이 내 입에 맞으면 맛있고, "예쁘지?" 확인하지 않아도 내 눈에 예쁘면 예쁜 것. "아 시원해!" 감탄하는 사람 없어도 내가 시원하면 시원한 것이다. 그야말로 나 좋으면 그만인 그런 경험은 낯설지만 매우 유쾌한 것이었다.


내 또래의 많은 여성들처럼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착한 아이'로 성장했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형제가 많은 가정환경과 군대 버금가도록 엄격한 학교 생활에서 양보와 배려는 미덕이기도 했고 생존 전략이기도 했다. 나만 좋아서는 안 되고, 옆사람 앞사람 뒷사람도 좋은지 체크해야한다. 다른 사람이 다 좋다면 내가 싫어도 양보하고 따르는 경우도 많다.


이번 여행은 그런 나로 하여금 나 하나만 신경 쓰며 살아보는 기회를 주었다. 처음 며칠은 두고 온 아이와 남편이 눈앞에 아른거렸지만, 하루하루 시간이 가면서 지금과 여기, 그리고 나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가끔씩 딸아이는 “엄마도 엄마 하고 싶은 걸 해”라든가 “엄마는 뭐 먹고 싶은데?”라며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엄마의 모습을 요구하곤 한다. 짐작컨대, ‘나를 위해 희생한 엄마’는 자식 입장에서 너무나 부담스러운가 보다. 여행과 일상은 엄연히 다르겠지만, 앞으로도 가급적이면 나 자신에게 집중하면서 살아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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