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느님 Jul 16. 2022

강릉 일기 #12

테라로사 본점과 강문해변 스피드보트

딸아이는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여 실컷 잘 수 있도록 두고, 어른 셋만 테라로사 본점으로 향했다. 오픈 시간에 맞추어 가면 기다리지 않고 바로 주문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손님들이 꽤나 있었다. 주문 순서를 위한 번호표를 뽑아 들고 테라로사를 안팎으로 둘러보았다. 내부는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구역마다 가구의 컨셉이나 인테리어가 조금씩 달랐다. 창문을 크게 내어 바깥 전망을 강조한 구역이 있는가 하면, 창은 작게 내고 몬드리안 스타일의 추상화를 걸어둔 구역이 있고, 커다란 방에 하나로 연결된 디귿 자형 좌석이 마련된 구역도 있었다. 야외에는 강아지를 동반할 수 있는 펫존도 있었는데, 클로이처럼 제발로 걸어다니는 강아지는 없고 가방에 들어있는 얌전한 아이들만 보였다. 야외 자리에 앉으면 볼 수 있는 농장에는 장닭과, 커다란 거위, 칠면조가 활보하고 있었다. 특히 거위들은 우리에게 뭔가 요구하는 듯이 위협적으로 말을 걸어왔다. 자세히 보니 아래쪽 부리에 치아가 있는 것도 같다. 웬만한 동네 양아치와 한판 붙어도 전혀 밀리지 않을 기세였다.


언니와 함께 어떤 자리가 좋을까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는데, 형부가 좋은 스팟을 찾았다며 전화를 걸어왔다. 테라로사 카페와 키친 사이에 위치한 내정인데, 프랑스 남부 지방이나 이탈리아의 정원 같았다. 대형 테라코타 화분에 키가 큰 올리브 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로즈마리와 세이지 같은 허브가 이국적인 느낌을 더해 주었다. 적당한 크기의 메타세쿼이아가 곳곳에 놓인 비스트로 테이블에 그늘을 드리워 주었다. 테라로사 키친 쪽에서 펼쳐 놓은 어닝 밑에 자리 잡고 앉은 우리는 각자 주문한 커피와 샌드위치, 바게뜨, 치아바타를 나눠 먹으며 담소를 나누었다. 몸 움직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형부가 주문한 음료와 빵이 나올 때마다 가져 오겠다며 일어나기에 '언니 결혼 잘했다'는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런 작은 칭찬에 형부는 춤이라도 출 기세로 기뻐하였다. 즐거운 대화는 끝없이 이어졌지만 날씨가 점점 더워져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딸아이는 스스로 일어나 아침을 챙겨먹고 있었다.




오후에는 내가 한번 가본 적 있는 오월에초당으로 식구들을 데려가 초계국수와 오징어 파전을 먹었다. 다들 맛있게 먹어서 보는 나도 행복했다. 식당에서 나오는 길에는 산딸기를 닮은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것을 보았다. 산딸기라고 하기엔 열매가 길쭉하였는데, 식당 직원에게 물어보니 복분자라고 했다. 빨갛던 열매가 검은 색으로 변하면 다 익은 것이라고 한다. 후식으로는 초당 순두부 아이스크림을 먹을 계획이었지만 배가 너무 불러서 일단 강문해변으로 향했다.


집에 있을 때는 너무 더워서 바다에서 놀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는데, 막상 해변에 오니 바람이 시원하고 하늘도 흐려서 해수욕을 하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준비해 간 돗자리와 비치 타월을 깔아 자리를 마련하고 신발을 벗었다. 수영을 하고 싶다는 사람은 없어서 그냥 발만 적셨는데 깜짝 놀랄 만큼 물이 시원하였다. 딸아이는 바닷물 속에 물고기 떼를 발견하고 눈으로 물고기를 좇느라 여념이 없었다. 페트병을 들고 연신 바닷물을 담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는 아마 물고기를 잡는 중이었나 보다.


강문해변에는 바나나 보트나 플라이 보트를 운영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스피드 보트 영업을 하는 사람은 있었다. 가격은 몇명이 탑승하는지와 무관하게 배가 한번 뜨는 가격이었다. 승선 시간과 거리에 따라 5만원 짜리 A코스, 8만원 짜리 B코스, 10만원 짜리 C코스와 더 비싼 D코스가 있었다. 네 명이 8만원 짜리 코스를 탄다면 에버랜드에서 제일 핫하다는 놀이기구를 타는 것과 비슷한 가격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걸로 골랐다. 신용카드는 취급하지 않았고 현금과 계좌이체만 받는다고 했다. 세금 때문에 그러리라는 의심이 들었지만, 기분 좋게 놀러 와서 얼굴 붉히고 싶지 않아 순순히 이체해 주었다.


보트를 타려는 사람은 많지 않아서, 금방 우리 순서가 돌아왔다. 각자 적당한 구명조끼를 입고 배에 올랐다. 이름은 거창하게 <드래곤>이지만 멀리서 보는 것과는 달리 매우 낡은 배였다. 탑승하면서 우리 딸 생일 선물이니 특별히 더 길고 재미나게 부탁한다고 말씀 드렸지만, 선장은 아무 반응이 없어서 괜히 딸에게 눈총만 받았다. 탑승이 끝나자 뱃머리를 돌려 출발 준비를 했는데, 부릉부릉 모터 소리만 요란하고 전혀 나아가질 못했다. 낡은 배가 출발부터 버벅거리고, 이거 괜찮을까 싶은 생각이 들 무렵 배는 갑자기 튕겨나가듯 출발했다. 해변에서 보는 것과 달리 파도가 꽤 있어서 배는 퉁퉁퉁퉁 튕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선장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스릴에 관심이 많은지 배를 이쪽저쪽으로 기울이며 가슴을 졸이게 했다. 물이 넘쳐 들어오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배를 깊이 기울여 대는 바람에 손잡이를 꼭 붙잡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딸아이가 잡은 손잡이는 선체에서 떨어져 덜렁거리고 있었다. 해변이 아득하게 보일 만큼 바다로 나가자 선장은 모터를 잠시 끄고, 그 자리에서 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곳의 수심은 약 50미터라는데 딱 보기에도 짙은 푸른 색이 그 깊이를 말해 주었다. 동해안은 수심이 급격하게 깊어진다고 어린 시절 배운 기억이 났다. 완만하게 깊어지는 서해안과는 달리 동해안은 바닥이 가파르게 깊어져서 여름철 인명사고가 나곤 한다. 


다시 모터를 가동시켜 해변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선장은 배를 좌우로 기울여 온몸에 힘이 들어가게 만들었다. 바닷가에 꽤 가까이 왔을 때는 최대한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 있도록 오토바이 폭주족처럼 굉음을 내며 해변을 따라 달렸다. 마침내 선착장에 도착하니 선장이 잊지 않고 딸에게 생일 축하 인사를 건넸다. 일부러 장난기가 발동하여 못 들은 체 하다가 마지막에 내 체면을 살려준 모양이다. 보트를 타는 동안에는 무서워서 입도 벙긋하지 않던 딸은 땅에 발을 딛더니 그제서야 손잡이가 덜렁거린 이야기이며 물에 빠지는 줄 알았다는 이야기이며 쉴새없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다시 밟은 해변의 모래를 이용해서 형부가 게임을 제안했다. 모래를 산처럼 수북하게 쌓고 막대기를 하나 꽂은 후, 돌아가면서 조금씩 모래를 제거하다가 막대기를 쓰러뜨리는 사람이 지는 게임이다. 이름이 무엇인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런 건 상관 없었다. 게임의 재미를 더하기 위해 내기를 걸었는데, 첫번째 라운드는 아까 먹지 못한 순두부 아이스크림이었다. 모두 조심스러운 성격이라 내가 과감한 역할을 자처하여 한번에 무지막지한 양의 모래를 퍼왔다. 순서가 두번 세번 돌아간 후 결국 언니가 막대기를 쓰러뜨리고 아이스크림을 사게 되었다. 다음 라운드는 커피콩빵. 나는 아까와 같은 전략으로 모래를 과감하게 퍼왔는데, 결국 막대기를 쓰러뜨린 사람도 나였다. 그래서 커피콩빵은 내가 사게 되었다. 마지막 라운드에는 오늘의 저녁 설거지를 걸었다. 형부가 막대기를 쓰러뜨리는 바람에 딸아이가 무패 완승을 거두었다. 딱한 재수생 처지를 생각하여 모두가 배려한 결과인지도 모르지만, 굳이 말은 하지 않았다.



여름 해변을 충분히 즐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은 형부의 제안으로 바베큐. 마당에서 불을 피우고 모기와 싸워가며 고기를 굽는 일은 무척 번거로운 일인데, 형부가 자청하여 바베큐를 굽겠다는 것이다. 약간의 시행착오를 거친 후, 숯이 준비되자 안정적으로 고기를 구워지기했다. 그동안 한번도 제대로 써보지 않은 썬룸에 상을 차리고, 마침내 네 사람이 둘러 앉아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구운 고기와 상추, 텃밭에서 딴 깻잎, 김치로 구성된 단출한 식사였지만 충분히 행복한 시간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 남은 숯불에 딸아이는 마시멜로를 굽고, 형부는 고구마를 묻었다. 다들 배가 불러 군고구마는 내일 아침 메뉴로 밀려났지만, 겉은 바삭하고 속은 녹아서 부드러운 마시멜로는 훌륭한 디저트가 되어 주었다.


바닷가에서의 모래놀이를 통해 정한 아이스크림과 커피콩빵 벌칙은 다들 배가 불러서 모두 무효가 되었지만, 저녁 설거지만은 아직 살아있었다. 그렇지만 고기를 굽느라 고생한 형부에게 설거지까지 시킬 수는 없어서 모두가 달려들어 순식간에 끝내 버렸다. 서로 살피고 아끼면서 추억을 만들어간 행복한 하루였다. 혼자서는 딸아이에게 이만큼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지 못 했을텐데, 오늘도 역시 혼자가 아니라서 더 좋은 하루였다. 한달음에 달려와준 언니 부부에게 감사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P.S. 이렇게 노는 와중에도 형부는 부지런히 강릉의 떡케익 전문점을 검색하여 딸아이에게 생일 케익을 선물해 주었다. 언니는 정말 결혼을 잘 했다.


형부가 선물해 준 딸아이 생일케익. 다음 날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한 생일 파티를 풍성하게 해주었다.






이전 12화 강릉 일기 #11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