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생에게도 숨쉴 틈이 필요하다
7월 10일은 재수생인 딸아이의 생일이다. "재수의 가장 큰 적은 친목과 연애”라는 2022년 대한민국 재수학원들의 신념에 따라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누구와 말 한마디는 커녕 눈빛조차 나누지 못한 채 자습, 인강, 학원 수강, 도시락 취식으로 하루하루를 채워가고 있다. 이토록 잔인한 재수생의 루틴을 자신의 생일에도 반복하게 하고 싶지 않아 목요일 오전 자습을 끝낸 딸을 납치하여 강릉으로 데려왔다. 다음 날 학원 자체 모의고사가 예정되어 있지만 애써 흐린 눈을 해본다. 이번 주말은 재수생이 아닌 것처럼 실컷 쉬게 해주겠다.
강릉에 도착하자마자 경포대 호수와 해변을 함께 걸었다. 날이 좀 더운 듯하였으나 파도가 거칠어 해수욕하는 사람은 없고 서핑하는 사람만 몇명 있었다. 준비한 돗자리를 해변에 깔고 잠시 서핑하는 모습을 구경하였다. 답답한 재수생활에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이길 바라며 바다 멍을 하다가 집으로 들어와 짐을 풀었다. 널찍한 마당과 방이 네 개나 되는 넓은 집을 둘러보느라 신난 아이에게 어느 방에서 지낼지 고르게 하였다. 침대와 푹신한 침구가 여러 겹 쌓인 방을 고르고, 그 침구들 위에 누워 마음껏 스마트폰을 볼 수 있도록 와이파이를 연결해 주었다. 아이에게는 역시 바다보다 스마트폰이 좋은 것이다.
해가 넘어가고 배가 고파진 우리는 가까운 막국수집을 향했다. 강릉에 시댁을 둔 친구가 알려준 물막국수 맛집이었다. 생각보다 손님이 없어 맛집이 맞는지 살짝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식탁 위에 놓인 동치미 물막국수와 메밀전은 한눈에 군침을 돌게 했다. 살얼음이 덩어리째 들어있는 동치미를 막국수에 부어 말아먹는 방식이었는데 적당한 양의 들기름과 김가루, 넉넉하게 뿌려진 깨소금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메밀전은 달구어진 팬에 반죽을 한 국자 쪼르르 부은 후 손으로 부추와 김치를 나란히 모양잡아 얹어 구운 모습이었다. 뽀오얀 메밀전 위에 유난히 빨간 김치와 초록색이 살아있는 부추가 보기에도 참 예뻤다. 딸은 자기가 얼마나 열심히 잘 먹는지를 보여주기로 작정한 듯 젓가락을 바쁘게 움직였다. (음식 사진을 못 찍어서 대신 식당 지도를 첨부하였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주말동안 먹을 것을 장만하러 하나로마트에 갔다. 강릉의 하나로마트는 생선 코너가 무척 풍성했다. 내가 사는 곳에서는 볼 수 없던 열기, 햇대, 도루묵, 망치 같은 낯선 생선들도 많았고, 멸치는 정말 다양하여 제일 작은 볶음용 멸치인 지리부터, 지가, 가이리, 고바, 가장 큰 육수용 멸치 디포리와 다시까지 크기별로 구비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지리는 XXS 멸치이고 디포리는 XXL 멸치였던 것이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생물 꽃게였는데, 포장을 찢고 나온 커다란 꽃게 한 마리가 생선 코너를 자유롭게 누비고 있었다. 신고 정신이 투철한 딸아이는 마트 직원을 찾아 이 사실을 알렸고, 잠시 후 수산코너 담당자가 와서 대수롭지 않은 듯 탈주 꽃게를 잡아갔다.
다음 날은 영화 <토르: 러브 앤 썬더>가 개봉하는 날이었다. 딸아이는 마블 시리즈의 열렬한 팬이므로, 이를 놓칠 수 없었다. 강릉 CGV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 예약을 한 후, 집안을 정리하고 길을 나섰다. 여유 있게 극장에 도착하였더니 무슨 일인지 10대로 보이는 무리가 여럿 있었다. 행동거지나 말투가 나에게는 몹시 거슬렸지만,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딸에 의하면 그 정도는 애교라고 했다. 영화는 상당히 비극적인 소재를 다루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유머 코드가 숨어있고 볼거리도 풍성했다. 러셀 크로, 맷 데이먼 등 탑스타들의 카메오로 출연하여 한껏 망가진 모습을 보여준 것도 깨알같은 재미를 더했다. 마블 시리즈의 열혈 팬답게 영화가 끝난 후에도 자리를 지켜 두 편의 쿠키 영상을 챙겨 본 후 극장을 떠났다.
오후에는 주말을 함께 보낼 손님이 한쌍 도착했다. 남편의 사촌 누이와 그 남편이다. 나보다 나이가 여섯 살 정도 많은데, 대화가 잘 통하고 배려가 많은 분들이라 주말을 함께 보내면 재미있을 것이다. 오시자마자 나에게 먹고 싶은 음식이 무엇인지 물어보셨는데, 그동안 혼자 지내느라 2인 이상 있어야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전혀 먹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해변 도시에 와 있지만 수산물 선택에 자신이 없어서 생선회를 먹어볼 용기를 내지 못했다는 사실도. 그래서 저녁에는 생선회와 대게찜을 먹기로 했다.
강릉에 십년 이상 사셨던 시외삼촌의 추천을 받아 주문진으로 향했다. 영업을 마친 수협 주차장에 눈치 빠르게 무료 주차를 하고 시장 안쪽 깊숙히 숨어있는 똘똘이네라는 횟집을 찾아갔다. 계절적인 이유로 대게는 모두 러시아산이었지만, 꼭 국산을 먹어야 할 이유는 없었으므로 두 마리를 주문했다. 생선회는 사장님의 추천을 받아 고랑치를 주문하였더니 조개찜, 오징어회, 열기 구이 같은 다양한 해산물을 곁들여 상차림을 해주었다. 딸아이는 처음 먹어보는 음식들이었는데, 낯섦을 극복하고 열심히 먹는 모습이 기특하였다. 다행히 대게찜은 거부감 없이 잘 먹었고, 초고추장도 찍지 않은 고랑치 회가 가장 맛있었다는 평가를 내려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배불리 저녁을 먹고 주문진 방파제의 등대를 보러 나갔다. 어둡고 냄새나는 길을 지나 마침내 방파제에 올랐더니 바다낚시를 나온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낚싯대가 어찌나 긴지 캐스팅을 할 때 혹시라도 내 코나 입, 그도 아니면 옷자락이 낚시바늘에 걸릴까 봐 걱정이 되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등대에는 빨간 불이 들어와있다. 저 멀리 해수욕장에서는 불꽃놀이가 한창이었다. 아마도 해수욕장 개장을 축하하는 행사가 있는가 보다. 등대 앞에서 인증샷을 찍고 돌아오는 길에 마침 낚시꾼 하나가 커다란 장어를 잡았다. 그 장어가 하필이면 우리 일행의 발 앞에 떨어지는 바람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힘차게 꿈틀대는 시커먼 장어의 모습이 꿈에 나올까 무서웠다.
서울에서 강릉, 강릉에서 다시 주문진 왕복 운전을 한 형부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어느새 잠이 들었다. 내일 아침에는 테라로사 본점에서 커피와 함께 브런치를 하기로 하고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늘 혼자였던 집에 네 식구가 잠을 자니 든든하고 충만감이 든다. 혼자라서 자유로운 것도 좋지만, 함께라서 더 재미있고 든든한 것도 사실이다.
이미지 출처: https://unsplash.com/@daiga_ella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