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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님 Jul 15. 2022

강릉 일기 #9

텃밭 정리와 뜻밖에 수확

여덟 시쯤 느긋하게 일어나 마당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등 줄무늬가 선명한 다람쥐가 나타났다. 사진을 찍으려고 보니 한 마리가 더 나타나 둘의 애정을 과시한다. 별채 지붕의 기와 밑으로 자유롭게 들락날락하더니 황매실 열매 하나를 들고 지붕 꼭대기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뚝딱 먹어 치운다. 옆집 할머니 말씀으로는 다람쥐가 여기에 집을 짓고 산다 하니, 언제든 까꿍 하며 또 나타날 것이다. 동네에 길고양이가 두어 마리 있어 쥐는 없다고 하는데, 다람쥐들은 활개를 치고 다니는 모양이다.


등에 줄무늬가 선명한 다람쥐 한 마리가 지붕에 앉아있다.


그동안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두었던 텃밭에 드디어 손을 댔다. 장마가 시작된다는 예보가 있었는데, 그냥 두면 감자가 땅속에서 썩어버린다는 이웃집 할머니 말씀에 용기를 내 본 것이다. 집에 면장갑이 없는데 사러 나가기는 귀찮아서 아쉬운 대로 라텍스 장갑을 꼈다. 벌레 먹은 자국이 가득한 감자 잎과 줄기를 힘껏 잡아당기니 생각보다 쉽게 쑥! 빠지며 올망졸망한 감자들이 딸려 나온다. 감자 줄기의 키가 1미터는 되는데, 감자는 막상 간장조림이나 해서 먹을 크기라서 웃음이 나온다. 몇 포기 더 뽑아 보니 그래도 간혹 아기 주먹만 한 감자도 있기는 하다. 감자줄기를 다 뽑아 땅이 드러나니 텃밭 뒤쪽에 버려진 호미가 하나 보인다. 녹이 많이 슬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지 싶어 손에 쥐고 땅을 살살 파보았다. 뜻밖에도 아기 주먹만 한 감자들이 여러 개 숨어있었다. 다 캐고 보니 자그마한 컵라면 상자 하나는 채울 정도의 양이 된다. 집주인 친구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텃밭의 다른 부분 역시 정리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청경채, 상추, 아욱 등 너무 오래 버려두어서 흡사 나무가 되어 버린 채소들을 뽑았다. 호미를 이용해 잡초도 한 무더기 뽑았다. 이렇게 해서 시원하게 맨땅이 드러난 텃밭을 보며 뿌듯해하고 있는데, 옆집 할머니가 나타나 말씀하신다. "거기 아무것도 안 심고 놔두면 잡초가 무성하게 자랄 거요." 그렇다고 내가 새로운 작물을 심어본들 다시 돌보는 손길이 없어질 테고 하여, 다가오는 본격 휴가철 동안 이 집에서 지낼 친구의 형제자매들에게 뒷일을 맡기기로 했다.

전혀 가망 없어 보였던 감자 줄기를 뽑았더니 나름 아기 주먹만한 감자들이 아담한 상자 가득히 나왔다.


어린 시절 농촌 마을에서 자라긴 했지만 우리 집은 농사짓는 집이 아니어서 뭔가를 수확해 본 적이 없다. 이웃집에서 벼를 베고, 고구마를 캐고, 배추를 뽑고 하는 계절이면 나는 그저 부러운 눈으로 바라만 보았었다. 그래서 오늘 땅을 파고 감자를 캐는 경험은 낯설고도 즐거운 것이었다. 흙냄새가 딱히 향기롭다고 할 수는 없지만, 뭔가 생명의 냄새라는 기분은 확실히 든다. 펄벅의 대지나 위화의 인생 같은 소설에서 대기근을 겪을 때, 오래전에 추수가 끝난 텅 빈 밭을 파헤쳐 고구마를 찾아내는 장면들이 있다. 그런 장면을 읽을 때면 이 흙냄새를 떠올리곤 했는데 그래서 자연스럽게 흙냄새에서 생명을 연상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짧은 노동이지만 수확된 감자와 말끔해진 밭을 보니 보람을 느낀다. 잡초를 뽑는 것보다는 확실히 생산적인 일이다. 서울시교육청 소속의 학교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요즘 한창 텃밭에 열을 올리고 있다. 무슨 연유인지 교육청에서 학교의 텃밭 사업을 지원하기 때문인데, 학교마다 방울토마토와 오이와 가지를 열심히 키우고 있다. 요즘 건강 문제로 일을 쉬고 있는 친구 하나는 이번에 전세 계약을 연장하면서 집주인이 텃밭 농사를 지어보라고 한 뼘 정도 되는 땅을 내어주었다고 한다. 다들 저마다의 사연으로 텃밭 농사를 하게 된 친구들이 주변에 많은 것이다. 나는 잠깐이나마 이렇게 텃밭 체험을 하고 친구들과의 대화에 제법 지분을 가지고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 또 하나의 수확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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