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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님 Jul 15. 2022

강릉 일기 #10

이웃사람들

하루 이틀 지내다 떠날 줄 알았던 내가 영 떠날 기색이 없자 이웃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찾아온 분은 이 마을에서 나란히 위치한 다섯 집 중에 가장 위쪽에 있는 집에 사는 아주머니다. 첫날 그 집 앞 공터에 잠시 주차를 했었는데, 차를 이 집 앞으로 옮기라고 찾아오셨었다. 이 분은 내가 아주 눌러앉을 사람처럼 보이자 걱정이 되셨는지, 집을 돌보러 한 번씩 오는 친구네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보셨다고 한다. 어쨌든 위험한 사람은 아니라고 판단을 하셨는지(내가 어디로 봐도 위협적으로 보일 인물은 못 된다) 대문 앞에 서서 동네 분위기를 알려주셨다. 그분 말씀으로는 이 동네 사람들끼리 자주 왕래하며 가깝게 지내는 것 같은데, 보기 좋은 풍경일 것 같다. 외관상으로는 반갑다고 얼굴을 트러 온 것이지만 이렇게 지내다 가는 외지인을 썩 반가워하는 것 같진 않았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자연스러운 보호본능이지 싶다.


이 마을에서 나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사람은 옆집에 사는 초등 3학년 여자 아이다. 첫날부터 마당에 나와 있길래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넸지만, 낯을 가리는지 제대로 대꾸를 하지 않았었다. 이 아이 역시 내가 일주일 넘도록 떠나지 않자, 드디어 이 집 대문 앞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아이 엄마와 할머니는 마당과 텃밭 관리 때문에 짧게나마 대화를 나눠 봤었는데, 딱히 나를 경계하지는 않았다. 아이 아빠는 지난번에 이 지역의 쓰레기 배출 방법을 알려주기도 하셨다. 아이는 스무 살짜리 언니와 보리라는 이름의 고양이도 함께 살고 있는데, 언니는 동생에게 큰 관심이 없는 듯하고 보리는 집 밖에 나오는 일이 없다고 했다. 학교는 시내로 다니는데, 대중교통이 없다 보니 가족들에 의지하여 등하교를 하고 있었다. 방학을 하면 마당에 간이 수영장을 만들어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아이는 세 살 때부터 이 마을에 살았다고 하고, 나에게 도롱뇽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아쉽게도 그날 도롱뇽은 보이지 않고 대신 커다란 개구리를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아이와 한참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아이의 할머니가 다가오셨다. 두 손 가득 마당에서 뽑은 잡초를 들고 계셨다. 내가 지내고 있는 집이 늘 비어있어 마당과 텃밭에 잡초가 무성하다고 걱정을 하셨다. 특히 잡초는 생명력이 강해서 다른 집까지 넘어오기 때문에 이웃 모두 합심하여 잡초 관리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듣기 좋은 얘기는 아니었지만 그 말씀 덕분에 지내는 동안 내내 마당의 잡초를 관리하게 되었고, 텃밭에 감자도 늦기 전에 모두 수확을 할 수 있었다. 살구인 줄 알았던 열매가 황매실이라고 바로잡아주신 것도 이 할머니였다. 


첫 번째 집 아주머니의 말씀과는 달리 동네 사람들이 활발히 교류하는 모습은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거의 보지 못했다. 아랫집 아주머니가 카페에서 포장해온 음료를 들고 첫 번째 집으로 가는 길에 나에게 잠시 인사를 건넨 적은 있지만, 그 외의 이웃들은 얼굴 한번 보지 못했다. 아이들이 아직 어리다고 했는데 옆집에 사는 3학년짜리 여자 아이 외에는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다. 설마 내가 자주 마당에 나와 있다고 해서 아이들에게 외출 금지령이 내려진 것은 아니기를 바라본다. 대중교통이 없는 곳이라 모두들 집 앞에서 차에 올라 외출했다가 주차를 하면 바로 집으로 들어가는 라이프스타일이라 그런 것이려니 생각해 본다. 어쨌든 시골 전원주택에 산다고 해도 예전 같은 공동체를 상상할 수는 없었다. 


클로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가 노부부가 새벽부터 밭작물을 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어제저녁에도 산책을 나갔다가 그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 댁은 커다란 밭을 끼고 있는 외딴 집인데, 꽃밭도 예쁘게 가꾸고 사신다. 나와 클로이를 보고는 어디 사느냐, 어디서 왔느냐 기본적인 질문을 하신 후 개들이 아무 데나 대소변을 봐서 겪는 고통에 대해 토로하셨다. 클로이 응가는 잘 주워서 봉투에 담아 들고 있었지만, 이웃의 다른 개들이 여기저기 배변활동을 해 놓은 것이 비가 오면 냄새로 느껴진다고 하셨다. 시골에서조차 개들의 대소변이 문제가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밭을 둘러싼 울타리에 호박꽃이 노랗게 피었다. 호박꽃과 똑같이 생겼지만 하얀 꽃이 핀 작물도 있었다. 하얀 꽃도 호박이냐고 여쭈었더니 '고지'라고 알려주셨다. 아마도 박을 강원도에서 그렇게 부르는 게 아닐까 싶다. 할머니는 불쑥, 오다가다 호박 열린 거 보이면 언제든지 따다 먹어도 좋다고 하셨다. 그 호박을 따먹을 일은 없었지만, 말씀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인심이었다.


산 밑에는 큰 개를 여러 마리 키우는 집이 있다. 시골 개들이 낯선 개에게 맹렬하게 짖어댄다는 것을 그간의 경험을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이 집 개들은 유난히 크고 행동도 거칠었다. 겁이 나서 지나가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길가에 승용차가 한 대 멈춰 서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네 분이나 내리셨다. 난처한 내 표정을 보시고는 괜찮으니까 그냥 지나가도 된다고 알려주셨다. 얼굴에 따뜻한 미소를 띠고 눈을 반짝이며 어디에 사는지 물어보셨다. 시골에는 젊은 사람들이 드물어 밭농사도 논농사도 어르신들이 짓고 계시다. 나도 적지 않은 나이인데, 어르신들이 보시기엔 동네에 젊은이가 하나 들어왔다고 반가워하시는 것 같다. 실망시켜 드리기가 죄송해 며칠 후면 떠날 사람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작은 시골 마을에 들어가 지내면서 이웃과의 관계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돌이켜 보니 처음 왔을 때 떡이라도 돌리면서 인사를 드렸어야 했나 싶다. 낯선 사람이 왔으니 환영해 주어야지 생각하는 것은 아무래도 기대하기 어렵다. 누군데 인사도 없이 들어와 저렇게 살고 있나, 하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다시 이 집에 와서 지내게 되면 그때는 작은 선물이라도 마련해서 이웃에 인사부터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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