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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님 Jul 15. 2022

강릉 일기 #13

강릉 여행 가이드가 되다

2022.7.14.

A friend from work이라는 영어 표현이 있다. 말하자면 직장에서 사귄 친구인데, 우리 말로는 적절한 번역어가 없다. 나는 1995년 12월(그렇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다)에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일터에서 친구를 만들지 못했었는데, 현재의 직장에서 A를 만나 야금야금 소울메이트가 되어갔다. '일로 만난 사이'에 친구가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데, 우리는 비슷한 가치관과 취향, 매너를 가지고 있다 보니 아무 일 없어도 그냥 전화하고, 개인적인 일들을 시시콜콜 나누는 절친이 되었다. 그런 A가 나의 강릉 생활을 공유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강릉행 KTX에 올랐다.


카톡으로 받은 열차표를 보니 10:57 강릉 도착, 6:40 서울행 열차 출발 일정이었다. 강릉에 머무는 시간은 약 7시간. 그녀의 강릉 여행 가이드로서 7시간 안에 강릉의 베스트를 골라 보여주고 경험하게 해주어야 한다. 빗속에 클로이 산책을 시킨 후, 강릉역으로 가 A를 맞이했다. 강릉역은 KTX 개통할 때 새로 지은 것인지 외관도 인테리어도 매우 모던하고 아름다웠다. 심지어 화장실도 매우 정갈한 구조에 벌집 모양의 금색 타일로 벽을 장식하여 고급스러운 느낌마저 주었다. 화장실이라 촬영은 하지 못 했는데, 혹시라도 강릉역을 가게 되면 소식이 없어도 꼭 한번 들러보기 추천한다. 주차장에는 미리 요금을 정산하는 키오스크가 설치되어 효율적으로 출차가 가능했다. 열차는 정시에 도착하여 A와 나는 강릉역 화장실에 영역표시를 한 후 경포를 향했다.

강릉역 역사 내에 있는 강릉 관광 안내도

A는 대학시절 혼자 유학을 결심하고 진행할 정도로 과감한 젊은이었지만, 아이 둘을 낳아 키우면서 생활 반경이 매우 좁아졌다. 신혼여행으로 하와이를 다녀온 후로는 바다에 가본 기억이 없는 듯했다. 경포 호수와 바다를 둘러보고 순수하게 좋아하는 모습에 마음이 흐뭇했다. 어제까지 퍼붓던 비가 거짓말처럼 멈추어서, 우리는 뽀송한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한동안 경포 바다를 바라볼 수 있었다. 바람이 꽤나 불고 기온도 23도 내외로 낮아서, 해수욕을 하는 사람은커녕 서핑을 하는 사람도 없었다. 해변을 찾은 사람들은 대체로 산책을 하고, 사진을 찍고, 우리처럼 자리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강릉을 대표하는 바다는 단연 경포이지만, 젊은이들의 취향에는 강문해변이 더 맞을 것 같다. 강문해변에 도착하니 하늘이 조금 열리면서 세상이 한결 환해졌다. 해변을 차지한 사람들의 연령대도 더 젊어진 것 같다. 우리는 오션 뷰를 즐기며 메밀 김밥을 먹을 수 있는 식당 2층 창가 자리를 차지하고 메밀 김밥 두 가지와 메밀전을 주문했다. 김밥 한 줄에 옐로 7000원, 그린 8500원이므로 일반적인 김밥에 비해 터무니없는 가격이지만, 밥 대신 메밀국수를 넣어 말았다는 참신함과 창밖에 아름다운 강문 바다가 펼쳐져 있다는 사실에 기쁜 마음으로 주문을 하였다. 지난번에 사진을 찍지 않아 아쉬움이 많았던 메뉴이므로, 오늘은 바다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겼다. 김밥 마는 사람이 바뀐 것인지 오늘은 고추냉이가 너무 많이 들어서 한 조각 먹을 때마다 숨이 턱 막히고 코가 얼얼했다. 다음에는 고추냉이 좀 적게 넣어주세요. 제발.

메밀김밥 옐로우. 밥 대신 메밀국수를 넣어 새롭다. 강문 바다를 내다보며 먹는 비용으로 김밥 한 줄에 7천 원!


메밀 김밥을 먹은 후에는 독특한 선물 가게 두 곳에 들렀다. 관광지의 선물가게들은 보통 어디서나 살 수 있는 기념품을 파는 경우가 많은데, <오리 선물>과 <유리알 유희>는 작품이라고 부를 만한 기념품을 많이 판다. 특히 강릉의 모습을 잘 담은 기념품들이 많아서, 내가 조금만 더 젊었더라면 아낌없이 지갑을 열어 바구니에 담았을 것이다. A는 곧 이사를 할 예정이라 지금 기념품을 사더라도 짐만 되는 상황. 마음 가볍게 '눈으로만 보는' 선물가게 투어를 마쳤다.


비는 오지 않지만 파도가 상당히 거칠기는 강문도 경포와 마찬가지였다. 방파제에 올라가 바다를 보고 내려오는데, 모래사장에 파닥거리는 은빛 물고기들이 보였다. 큼직한 다시 멸치 크기의 물고기였는데, 파도가 이 물고기들을 모래밭에 던져놓고 가는 상황이었다. 바닷물이 들어올 때 쓸려 들어왔다가 물이 빠져나갈 때 모래 위에 남겨진 물고기들은 몇 번 파닥거리다가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그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죽어가는 물고기들을 도와줄 방도가 없어 안타까웠다. 가족과 함께 나온 꼬마 아이도 처음엔 파도에 밀려오는 물고기를 보고 즐거운 비명을 지르다가 그 물고기들이 바다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는 모습에 결국 망연자실하였다. 한 젊은 남자는 모래 위에 남겨진 물고기 몇마리를 손으로 집어 물에 던져 주었지만, 다시 파도에 실려 모래밭으로 돌아왔다. 뜰채를 가져와 이렇게 쓸려온 물고기를 한 자루 담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아마도 이런 일이 오늘만 일어나는 이변은 아닌가 보다. 동영상을 찍었지만, 공유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듯하여 생략한다.

안목해변에 오니 구름이 걷히며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안타까운 물고기들을 뒤로하고 우리는 안목해변 카페거리를 향했다. 지난번 바닷가 1열 자리를 차지하고 매우 만족했었던 AM이라는 카페 3층에 다시 갔는데, 오늘은 통유리창이 완전히 개방되어 바다와 우리 사이에 아무 장애물이 없었다. 잠시나마 나는 최근 내린 비로 유리창이 깨끗해졌다고 착각을 하였는데, 사실은 유리가 아예 없었던 것이다. 안목해변은 앞서 다녀온 두 해변과는 확연히 구분되게 연인들이 많았다. 해변에 서 있거나 앉아있는 사람 중에 남녀 커플이 아닌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 요즘 젊은 연인들은 애정 표현도 어찌나 과감한지 누가누가 더 사랑 넘치는 커플인지 경연대회라도 열린 듯했다. 연인들 외에도 안목해변에는 해양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특히 경포와 강문에서는 보지 못했던 요트 한대가 바다를 가로질러 가며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우아한 모습에 바나나 보트나 스피드 보트가 갑자기 너무 경박해 보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다음에 강릉에 오게 되면 꼭 요트를 한번 타야겠다.

바다를 유유히 가로지르는 요트

바다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자리에 앉아 우리는 각자 커피 한 잔과 물 두 잔씩을 비워가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A와의 대화는 화장실 고민부터 국제 분쟁 문제까지 온갖 주제를 넘나들며 끝이 없지만 언제나 흥미진진하고 위로가 된다. 나는 브런치 작가 신청이 통과되었다는 연락을 이 자리에서 확인하는 바람에 나의 기쁨과 기대가 고스란히 들통나기도 했다.


A는 나를 위한 선물로 수공 가죽 핸드백을 가져왔는데, 금속 재질의 링 손잡이와 카키색이 아름다운 가죽 바디로 이루어져 있었다. 공작색의 안감은 색감과 촉감 모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A의 언니가 취미로 가죽 핸드백을 만든다고 알고 있었는데, 따로 부탁을 하였는지 아니면 언니가 만든 제품 중에 하나를 구매하였는지 너무나 감동적인 선물이었다. 딱 하나 아쉬운 점은 이 멋진 가방을 들고 갈 곳이 없다는 것. 나의 사교 생활을 좀 확장해 보아야겠다.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시간 가는  모르다가 5시가 훌쩍 넘었다. 화들짝 놀란 우리는 재빨리 아까  두었던 안목항의 선물가게  곳으로 향했다. 결론만 얘기하자면, 선물가게는 강문해변에서 들르기를  잘했다. 서둘러 주차장으로 가며 확인해 보니 열차 시간까지 20 정도 여유가 있었는데,  정도 시간이면 빠르게 월화거리를 둘러보기에 충분할  같았다. 저녁까지 먹여서 보내야 마땅하겠으나, 나보다  작은 위장을 가진 A 점심에 먹은 메밀 김밥이 아직도 목구멍까지  있단다. 메밀 김밥을 고른 이유가 '메밀은 소화가  니 얼른 배를 꺼뜨리고 다른 강릉음식을 자’는 것이었는데, 완전 실패다. 어쨌든 기왕 저녁 식사는 어려운 시간이기도 해서, 고민할  없이 월화거리로 향했다.


월화거리 공영주차장은 무슨 이유인지 진입이 불가하여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당황스러웠지만 배포 좋게 직진을 하고 보니 노변 주차장에 주차된 첫 번째 차가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재빠르게 비상등을 켜고 그 자리에 주차를 하였다. 내가 생각해도 대단한 순발력+운이었다. 월화거리를 채우고 있는 빈티지한 선물가게들과 물고기 모양의 소원지, 강릉 바다를 닮은 푸른 등의 물결, 색색의 페투니아로 장식된 월화교의 기나긴 양쪽 난간, 무슨 이유에서인지 동자와 보살이 오밀조밀 모여있는 골목 등을 빠르게 구경한 후 A의 가족들과 나눠먹을 커피콩빵을 사서 강릉역으로 향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월화거리를 가봤다'라고 말하기에는 충분하다고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차에 올랐다.


강릉역에 도착한 시간은 6시 20분. 한번 더 가고 싶은 강릉역 화장실에 들러 먼길 떠날 준비를 하고, 타는 곳으로 이동하였다. 재미있게도 승강장 입구가 공항의 비행기 탑승구처럼 테이프로 가로막혀 있었다. 안내를 보니 열차 출발시간 10분 전에 게이트를 오픈하는 모양이었다. 강릉에서 KTX의 위상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시간이 되자 게이트가 열리고, A를 들여보냈다. 마지막 순간까지 손을 흔들면서 대단한 이별을 하는 듯 과장스러운 동작을 해 보았다.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A는 오랫동안 기다리던 소식을 받았다. 한동안 A의 삶에 안정감을 가져다 줄 뉴스였다. 오늘은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완벽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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