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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님 Jul 17. 2022

강릉 일기 #14

지금 이 순간 나 혼자라서

내가  처음으로 행복하다고 느낀 순간은  다니던 회사를 휴직하고 영국 남부 해안의 어느 소도시에서 아무 존재감 없이 어학연수를 하던 시절이었다. 2월 말의 어느 아침 걸어서 학교를 가는 길이었다. 유난히 따뜻했던 그날 아침 햇살 속에서 하얀 수선화들이 이웃집 앞마당에 가득하게 피어나 눈부신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나는 문득 그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기고 멈추어 서서 행복(bliss)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아무것도 더 바랄 것이 없다는 기분을 느꼈다. 하얗게 빛나는 그 꽃들 중에 한 송이 꺾어 손에 쥐고 싶은 욕심도 들지 않았고, 사진을 찍어 누구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고, 지금 누군가 내 옆에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그런 마음도 없었다. 시간이 멈춰 버리기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만약 어느 순간 시간이 멈춰야만 한다면 그 순간에 멈추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행복이라는 감정을 경쟁에서의 승리, 성취, 사회적 성공을 통해 얻어지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을 때나, 간절히 원했던 직업을 갖게 되었을 때에도, 심지어 남편과 결혼을 했을 때에도 이런 행복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그때의 감정들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자부심, 성취감, 안도감 같은 것이었지 행복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물론 그 당시에 누군가 나에게 행복하냐고 물었다면 주저 없이 그렇다고 답했겠지만 말이다. 


강릉에 와서 지내는 동안 나는 다시 문득문득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있다. 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치고 마당에 놓인 그네에 앉아 책을 읽을 때, 바다가 보이는 3층 카페에 앉아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빛을 바라볼 때, 꽃이 만발한 능소화 덩굴 아래 편안히 누워있는 클로이를 볼 때, 밤 사이 내린 비가 거미줄에 남긴 구슬 방울들을 볼 때... 이런 순간들에는 기쁘거나, 신나거나, 뿌듯하거나,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저 좋다. 행복하다.


강릉에 가서 혼자 한 달쯤 지내겠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다. 혼자 강릉 가서 뭐 하게? 무섭지 않겠어? 같은 질문들이 쏟아졌다. 나도 여기 와서 무엇을 할지 아무 계획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도착한 다음 날 아침에는 아, 오늘은 뭘 하지? 하며 막막한 마음에 여행 블로그를 검색하고 좋다는 데를 찾아다녔다. 처음 며칠간은 일정을 꽉 채워 다니며 나 이렇게 잘 지내고 있다고 스스로와 세상에 증명하려 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아침 나는 마당에서 커피를 마셨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피하려고 지붕을 얹은 그네에 엉덩이를 반쯤 걸치고 몸을 앞뒤로 천천히 흔들면서. 그네는 앞뒤로 움직이며 규칙적인 끼이익 끼이익 소리를 냈는데, 그 순간 나는 조용히 좋다,라고 읊조렸다. 신발을 벗고 완전히 그네에 올라가 양반다리를 한 채 상체를 힘껏 밀어 보았다. 서서 타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그네는 제법 오르락내리락하며 리듬을 만들어냈다. 오늘은 뭘 할까, 어딜 가고 뭘 먹을까 하는 생각이 사라지고 오늘은 이렇게 집에 있어도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왔다면 나는 이런 순간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여행을 만드느라고 관광지를 검색하고, 놀거리를 찾고, 식당을 예약하고, 간식거리를 챙기느라 나 자신에게 집중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 혼자 긴 시간 이렇게 멀리 와 있으니 어느 누구에게도 신경 쓰지 않고 나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가 있다. 여기서 지내는 동안 나는 오직 나 자신만 돌보면 되고, 내 기분과 내 욕망만이 나의 관심사였다. 가끔씩 클로이의 갈증과 배고픔과 심심함과 근질거림도 관리해 주어야 했지만, 그 정도는 아무 방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20대 여성이었을 때는 혼자서 여행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섭기도 했고, 필요 이상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서, 이제는 별로 무서운 것도 없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본다는 착각에서도 많이 벗어났다. 덕분에 혼자서 이렇게 긴 여행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더 젊었을 때, 아니 어렸을 때 이렇게 나 자신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았겠지만, 지금이라도 이런 기회를 가질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나의 약점 중 하나는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고 친해지면 아예 가족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드물게는 나를 가족처럼 받아주는 친구도 있다. 강릉 집을 나에게 턱 내어주고 마음껏 쉬다 가라고 한 그 친구도 그런 귀한 사람 중에 하나다. 우리는 내가 미국에서 처음 교수가 되었을 때 만나 3년 동안 이웃에서 함께 아이들을 키웠다. 내가 귀국하면서 가끔 소식이나 전하며 지낸 지 벌써 10년이 되었는데, 여전히 친구로 생각하고 이런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나는 늘 신세를 진 기억뿐이라, 친구가 은퇴를 하고 정말 강릉에서 지내게 되면 나도 좀 베풀 기회가 생기길 소망해 본다. 


밤 사이 비가 많이 내린  아침. ‘조롱조롱 거미줄에 옥구슬'


맑은 날 아침에는 마당에 서서 눈부신 파란 하늘을 본다.



상단 이미지 출처: https://unsplash.com/@bencoll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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